맑고 투명한 햇볕이 내리쬐는 남녘의 들판. 허리를 깊이 숙였던 농사꾼 몇몇이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면 하늘 위로 거대한 군 수송기들이 줄지어 날아든다. 군용기 내부, 드디어 출동이라고 비장해하던 군인들 사이에 누군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린다. “비행기가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가고 있어.”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돌입한 이들의 풍경은 상상의 재현이다. 그렇지만 화려한 휴가는 실명의 작전이었고, 곧 그 화려한 실재가 재현된다.
상상과 맞붙인 실제의 시뮬레이션
5월21일 정오 무렵, 계엄군이 철수키로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면서 광주 금남로의 도청 앞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빠져든다. 택시기사 인봉(박철민)과 제비족 용대(박원상)가 까불거리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상상의 재현이다. 오후 1시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계엄군은 철수는커녕 일제히 탄창을 끼워넣고, 조준 자세를 취한다. 시민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격이 애국가와 더불어 시작된다. 점프컷과 개각도 촬영, 부서지는 유리창과 쏟아지는 비명과 총격 소리는 <쉬리>와 <실미도>의 영화적 연출과 닮았다. 그렇지만 이 학살은 실재의 재현이다. 다큐멘터리적 느낌을 배제한 것에 가까운, 눈과 귀를 영화적으로 자극하는 액션이다. 이 액션의 순간이 지나가면, ‘금남로 학살’이란 표현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배우들의 코믹과 맞붙인 끔찍한 실재의 시뮬레이션은 또 있다. 광주 교외의 한적한 도로에 정차한 시외버스에서 급히 내린 시민군이 논 사이에서 배를 움켜쥐고 설사를 시작한 사이, 승객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로 재진입하던 공수부대원들과 맞닥뜨린다. 계엄군은 평범한 승객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총을 난사한다. 이 학살극 역시 실재했던 사건이다. 원경으로 잡은 이 숏은 베트남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마저 불러일으키지만, 전쟁 중이 아닌 1980년 5월 남녘의 벌건 대낮에 일어난 일이다.
정치군인과 반대 노선을 걷다 퇴역한 예비역 대령 박흥수(안성기)는 광주에서 택시업체를 경영하다 이상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장성이 된 옛 동료와 부하를 찾아가 자제를 호소한다. 물론 정치군인의 ‘각오’는 흐트러짐이 없다. 덕분에 그의 딸 박신애(이요원)와 신애를 사랑하는 택시기사 강민우(김상경)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전형의 캐릭터들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내몰린다. 민우가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우(이준기)는 계엄군의 살인적인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끔찍한 일을 당하고, 계엄군의 사냥에 먹이가 될 뻔한 신애의 위기가 민우의 눈앞에서 펼쳐진다. 극적으로 변신한 민우는 무기고를 탈취해 시민군의 무장에 앞장선다. 이는 상상적 구성이지만 이들의 뿌리 역시 실재에서 출발한다. 민우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택시기사 김복만(당시 28살)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과 시위에 동참했다가 도청의 최후 항쟁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홍순권(당시 20살)의 복합적 재현이다.
신애의 실재적 재현은 영화의 절정부를 구성한다.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애절한 목소리로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로 되살아난다. 상상의 공간이 가장 크게 작동하는 예비역 대령 박흥수조차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던 진압 지휘자를 모태로 삼았다.
드라마적 재현에 충실한 <실미도>식 직설화법
실존인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지만 허구가 틀림없는 이들이 겪는 시뮬레이션은 다시 5·18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나 사진 속으로 들어간다. 속옷 차림으로 포로가 된 시민들과 이들을 총과 몽둥이로 몰아세우는 거리 풍경, 실내 체육관 내부를 가득 메운 수많은 관들, 그리고 27일 새벽의 도청 속에 그 허구들이 서있다. 특히 민우와 신애는 투박한 멜로 위에 서 있는데 그 선 위에 얹은 직설화법이 말하자면 <실미도>적이다. 이 직설화법의 목표는 일견 명쾌하다. 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도대체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목격하라는 사건의 드라마적 재현에 대한 충실이다. 장선우의 <꽃잎>과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신중현과 김추자의 노래 <꽃잎>을 부르는 5·18은 거리두기를 요구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하는 <화려한 휴가>는 저항없는 몰입을 요구한다. <꽃잎>에선 광주 이외의 외부자가 많이 개입하지만 <화려한 휴가>에선 오로지 광주뿐이다. 기묘하게 통하는 건 <꽃잎>이 지식인을 불신하고 비판하며 <화려한 휴가>는 지식인을 아예 배제해버린다는 점이다. <화려한 휴가>를 보기 위해선, 혹은 보고 나서는 자꾸 <꽃잎>에 대한 복기가 필요하다.
<꽃잎>의 소녀(이정현)의 오빠는 대학생이었다. 오빠 친구들(설경구, 추상미 등) 앞에서 김추자의 <꽃잎>을 부르며 여름 한철을 즐겁게 보낸 기억이 그들 모두에게 생생하다. 그 오빠가 데모했다고 강제징집된 뒤 의문사한다. 오열하던 소녀의 엄마는 단정한 차림으로 광주 금남로의 시위대로 향하는데 소녀가 굳이 따라붙는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금남로 학살이 시작되고 도망가다 쓰러진 소녀를 보살피려던 엄마의 가슴에 총알이 꽂힌다. 소녀는 죽어가면서도 놓지 않는 엄마의 손을 밀쳐내고 홀로 도망가지만 끝내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눈을 뜨자 얼굴이 뭉개진 수많은 시체 더미 속이다. 군인들이 암매장하는 그 틈 속을 기어나와 살아난 소녀는 대신 정신을 놓는다. 미친 소녀는 막노동꾼 장(문성근)을 오빠라 부르며 따라붙고 장은 소녀의 몸을 수시로 유린하는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으론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국민투표로 제5공화국이 출범하며, 오빠의 대학생 친구들이 소녀를 찾아 남녘을 헤맨다.
해석과 승화를 작가주의적으로 담은 <꽃잎>보다 사건에 몰두하는 <화려한 휴가>가 선행하는 게 일견 바른 순서 같다. <화려한 휴가>가 ‘선행했어야…’라는 건, 1996년 <꽃잎> 개봉 때 왜 광주의 집단적 폭력을 후경에 깔고 강간이라는 개인적 폭력을 전경에 끌어들였느냐는 당시의 질문 때문에라도 가능하다. <화려한 휴가>는 집단적 폭력을 거침없이 전경에 깔았다. <꽃잎>에서 광주는 지식인의 의식적 운동에 빚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학생 아들의 데모가 아니었다면 무지렁이 어머니가 한맺혀 금남로 시위에 나설 리 없었고, 그랬다면 소녀가 맞이하는 광포한 폭력도 없었을 것이다. 5·18이 벌어지고 나서 소녀를 찾아 헤매는 지식인 집단 ‘우리들’은 소녀와 마주쳤던 어린 왕자(박광정)와 더불어 멜랑콜리에 젖어 있다. 이 지식인에 대한 질타는 계급 밑바닥에 있는 장을 통해서 말해진다. “선생님들, 이 시발놈들아 왜 사람 무시해. 나도 잘할 수 있어. 걔(소녀) 찾아주면 나도 잘할게요. 이 시발새끼들아.” 영화는 소녀와 5·18이 얽힌 사연을 무덤가에서 알게 되는 장의 모습에서 끝난다. 악행을 저지르던 장이 무언가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 무산자가 거대한 폭력의 끔찍함을 뒤늦게 깨닫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껏 살아온 대로 작은 무력으로 맞서는 것 말고 없지 않을까. <화려한 휴가>는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데올로기 없는 순수한 항의자로 고등학생이 나오고, 그가 죽으면서 무산자가 폭력을 깨닫고 무장을 시작한다. 도청의 마지막 순간까지 대학생이나 야학 교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거의 유일한 지식인은 김 신부(송재호)뿐인데 그의 입은 그다지 많이 열리지 않는다.
장르적 장치의 사용, 이데올로기의 배제, 시선의 역설
김지훈 감독은 방대한 증언록을 검토한 결과, 지식인의 배제가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그저 내 친구가, 내 가족이 궁금하여 거리로 나선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라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려야 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다만 관객이 그 현장 속에 잠시 들어가주길 바랄 뿐이라고. 그래서 <화려한 휴가>는 현장의 재현에 충실하는 동시에 관객이 그 속에 들어오길 돕는 장르적 장치들을 과감히 사용한다.
이제 그 장르적 장치와 괴물 같은 학살 시뮬레이션의 효과를 어떻게 해석할지 ‘용기’를 낼 순서다. 결론적으로, 박철민과 박원상이 담당하는 코미디와 김상경과 이요원의 멜로드라마는 역사의 무게감을 덜어낸다.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노리는 대중적 코드일지 몰라도 흥행법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느낌이어서 거꾸로 먹먹한 슬픔에 방해될 여지마저 보인다.
또 5·18을 직설화법으로 다루면서 ‘영문도 모른 채’ 자기방어적으로 역사에 휘말리는 시민의 시선을 유지한 것은 일관되나 역설이 작용한다. 일찌감치 시위에 앞장선 광주시민의 요구와 절박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힘든 구조다. 발포명령자를 익명의 정치군인에게 미뤄버린 듯한 인상과 더불어 욕구불만의 원성을 살 만한 대목이다.
이데올로기와 해석을 배제한 재현이라는 점은 9·11 테러의 한 사태를 다룬 <플라이트 93>을 떠올린다. <플라이트 93>은 9·11 당시 알카에다에 납치된 미국 민항기 4대 중 유일하게 표적에 충돌하지 않고 추락한 UA93의 여정을 엄밀하게 재현했다. 조종석을 점령한 아랍인들과 승객들이 난투극을 벌인다. 승객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인들은 다함께 죽기 위해. 영화는 국회의사당으로 추정되는 표적 대신 펜실베이니아 벌판에 내리꽂히는 순간과 함께 끝나버린다. 해석과 개입을 배제하려는 숭고한 재현이지만 눈과 귀로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느낌의 재배치까지 쫓아내진 않는다. 그건 결국, 영화평론가 황진미의 비평처럼, “정치적 맥락을 배제한 채 상황에 주목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이며 “다큐적 기법 아래 미국의 정치적 입장과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무력을 행사해보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향해가는 백인 승객들과 신념에 대한 설명없이 초조함과 무모함만 드러나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대비가 주는 것은 분명하다.
대상에 대한 재배치의 작동을 포기하는 시뮬레이션이란 상상하기 힘들다. <화려한 휴가>의 학살 시뮬레이션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다시 공유하길 요구한다. 그 슬픔은 죄의식으로 통하는 길이다. 젊은 세대에겐 모르고 있었다는 무지에 대한 죄의식, 기성 세대에겐 잊고 있었다는 망각에 대한 죄의식을 작동시킨다. 죄의식의 절대 조연은 극장 밖으로 나서는 순간, 오감에 포착되는 그 모든 것이다. 영화의 시뮬레이션을 아주 낯설게 하는, 극적으로 동떨어진 현실은 물론 실재다. 두 가지 실재의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건, 크든 작든 역시 죄의식이다.
죄의식의 끄트머리에 이물감처럼 불편함이 묻어난다. 재현이 자극하는 것의 최종 심급이 뭔지 궁리할 수록 그 뒤켠에 똬리틀고 있는 거대한 자본이 떠오른다. 100억원을 먹고 탄생한 이 시뮬레이션이 흥행코드에 과다하게 의지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결국, 자본의 목표는 죄의식의 소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