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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볼 수 없다. <스파이더 맨>이나 <슈퍼맨> 혹은 <엑스맨>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심지어 <다이하드4.0>의 브루스 윌리스 역시 해체된 가족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는 선남선녀들이 등장함에도 진한 로맨스의 여운도 없고, 세상의 끝에 다다른 방랑자의 고뇌도 없다. 매 시리즈 슈퍼히어로 같은 역할을 거뜬히 해내면서도, 잭 스패로우는 영웅임을 거부하는 무법자이자 추방된 자의 전형이다. 오로지 패션과 기질만으로 팬들을 흡수한 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역사상 가장 기괴한 슈퍼스타라 할 수 있다. 최근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블록버스터 세계의 무게를 비웃기라도 하듯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진짜 롤러코스터의 재미란 무엇인지 그 진수를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출신 성분부터가 기괴한 영화다. 요즘 할리우드의 트렌드가 게임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는 하지만, 테마파크의 놀이기구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니. 악동들이 나와 갖은 기행을 저지르는 <잭애스>(2002)처럼 황당한 쇼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경우라 해도, 거기에는 기발한 캐릭터와 스토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적어도 하나의 상황이 존재하는 원작이라면, 발전시켜나갈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놀이기구에는 대체 어떤 캐릭터와 스토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놀이기구의 핵심은 찰나의 쾌락
테마파크에서 놀이기구를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놀이기구의 즐거움은 결코 공감이 가는 캐릭터나 스토리가 아니라, 찰나의 쾌락인 것을. 놀이기구에서 스토리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짜릿함이다. 올랜도의 디즈니 ABC 스튜디오에 있는 ‘트와일라이트 존’(국내에는 <환상특급>으로 소개됐던)에서는, 네모난 객차 같은 것을 타고 드라마에 나왔던 오래된 성 안을 헤매게 된다. 드라마의 기억을 되살리며 두리번거리다 보면 여기저기 유령이 나타나고, 이상한 괴물들도 튀어나온다. 마지막에는 탑 안으로 들어가더니 하염없이 올라간다. 갑자기 벽이 열리면서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는 급전직하. 그것으로 놀이기구 ‘트와일라이트 존’은 끝난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놀이기구 ‘트와일라이트 존’의 클라이맥스는 공중 낙하다. 포장된 스토리는 그저 눈요기일 뿐이다.
간혹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터미네이터 3-D’처럼 영화와 다른 독자적인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캐릭터가 이미 완성됐기에 가능한 것이다. 놀이기구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이미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았다는 전제를 깔고, 영화 스토리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다. 반면 ‘빽 투 더 퓨처’나 ‘쥬라기 공원’ 등 영화를 이용한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영화 속 장면을 조금 상기시키다가는 역시 빠르게 공중에서 회전하거나 떨어지는 놀이기구 본연의 즐거움으로 유도한다. 이야기는 양념이고, 핵심은 찰나의 카타르시스다.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싶다면, 놀이기구가 아니라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워터월드’나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처럼 스턴트맨이 등장하여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쇼를 만드는 것이 낫다. 그게 더 즐겁고 멋지다. 영화는 캐릭터와 스토리, 놀이기구는 중력을 위반하며 달리는 쾌감이 역시 최고다.
해적 이야기에 발목잡히지 않는 해적, 잭 스패로우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놀이기구로 시작해서, 최고급 블록버스터로 변신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까? 고어 버빈스키의 첫 번째 선택은 캐릭터였다.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는 시리즈의 첫편인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2003)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해적선 선장의 통속적인 이미지라면, 남자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잭 스패로우는 모든 규칙은 물론 선입견까지 뒤집어버린다. 선장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의리마저 저버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하를 버리고, 소중한 약속을 사소한 이유로 내팽개치는 등 잭 스패로우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배신할 수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묘하다. 3부작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잭 스패로우는 영웅임을 거부하는, 무법자의 전형이면서 동시에 그것까지도 위반해버리는 캐릭터다. 그 복합적이고 만화적인 캐릭터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성공요인이었다.
해적물의 기본적인 테마는 모험과 성장이다. <보물섬>이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이야기가 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후크>에서 중년이 된 피터 팬이 후크 선장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해적은 어른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다. 그들이 꿈꾸는 해적의 세계에서만은 영원히 소년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자신들은 소년에서, 결코 원치 않았던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만은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보물섬>에서 일본 만화 <원피스>까지 해적물의 기본적인 플롯은 영웅이 등장하여 모험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해적을 동경하는 소년이 모험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이다. 물론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도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의 캐릭터가 잭 스패로우에 비해 지나치게 허약하다는 것이 문제다. 윌(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가 성장하는 과정에 공감해야 할 관객은, 익살맞고 자유분방한 잭 스패로우에게 푹 빠져버렸다. 1편의 성공은 순전히 잭 스패로우 때문이었고, 그 덕에 진정한 주인공이 됐어야 할 윌과 엘리자베스는 3부작 내내 조연 같은 위치에 머물러버렸다. 윌과 엘리자베스가 성장을 하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도 아니고 관객도 별 관심이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캐릭터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이미 완성된 캐릭터의 유희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1편이 성공을 거둔 뒤, <캐리비안의 해적>은 3부작을 넘어 5편까지 만들어진다는 계획으로 나아갔다. 연이어 만들어진 <캐리비안의 해적> 2, 3편은 1편의 캐릭터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착취’의 어감은 안 좋지만, 그건 지극히 합당하고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이미 검증된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주변으로 갖가지 모험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갖가지 모험이란, 우리가 해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 거대한 심해괴물 크라켄,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사지로 몰아넣는 칼립소와 인어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에 상상했던 세계의 끝에 있는 거대한 낭떠러지, 식인종이 있는 야만의 섬 등등 ‘해적’ 하면 떠오르는 모든 신화와 전설 그리고 상상이 이 시리즈에 망라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동인도회사와 해적의 관계, 근대 이후 몰락한 해적의 운명 등도 스토리에 부연된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한다고 해서 <캐리비안의 해적>이 해적이라는 ‘개념’에 빠져들 리는 없다. <캐리비안의 해적>이 역사나 신화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다만, 잭 스패로우와 기발한 캐릭터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거칠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해적이 등장하는 시각적 놀이기구이다.
해적의 모든 것을 끌어들인 놀이기구
생각해보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일관된 이야기가 거의 없다. 있기는 하지만, 마구 흐트러지면서도 추스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잭 스패로우가 블랙펄호를 되찾는 이야기, 플라잉 더치맨호의 선장 데비 존스의 원한을 풀어주고 사랑을 맺어주는 이야기, 막강한 동인도회사에 몰려 쇠락하는 해적의 일대기가 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중심은 아니다. 칼립소가 나와 뭔가 거대한 복수를 할 것 같더니 그냥 사라져버리고, 난데없이 엘리자베스가 칼립소라는 말도 나오지만 흐지부지된다. 동인도회사의 커틀러 버켓 경의 목적도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아니 사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스토리는 여러 가지가 모여 하나의 결말을 향하여 달려가는 구조가 아니다. 각각의 캐릭터가 기이하게 등장하고, 그 캐릭터들마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하나씩 있다. 영화는 그저 각자가 목표를 이루는 과정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영화가 어디로 굴러가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각 캐릭터의 관계들도 수시로 뒤집어지고 뒤틀린다.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캐릭터들이 등장해 각각의 역할을 하고, 스펙터클한 모험의 진경을 보여주고 퇴장하는 것뿐이다. 그건 놀이기구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만나게 되는 잘 꾸며진 장면들을, 환상적인 활동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그것은 ‘가짜 카니발리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짜’인데. 가짜와 진짜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 아닐까? <캐리비안의 해적>은 아무런 ‘의식’없이, 해적의 모든 것을 끌어들여 신나는 놀이기구로 만들어버린 영화다. 때로는 그런 유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