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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드4.0>은 올해 여름 블록버스터들 중 가장 시대착오적으로 보였다. 다를 영화들과 비교해 가장 연세가 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다, 이미 그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되어지던 시리즈가 오직 영리를 목적으로 재점화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일한 배우가 등장하는 3편과 4편 사이의 공백 기간이 무려 12년이라는 점은 기대보다 우려를 키웠던 것. 하지만 <다이하드4.0>은 그 공백 기간 동안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존 맥클레인의 처량한 신세 그 자체를 역으로 이용한다. 자동차 하나만은 카레이서처럼 터프하게 다루지만, 컴맹에다 만년 강력계 경찰인 한 홀아비 이혼남의 액션에 반응하게 만든 것이다. <다이하드4.0>은 바로 그간 명맥이 끊긴 것으로 여겨지던 하드보디 블록버스터의 역습이다.
우리 시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점령한 것은 모두 수퍼 히어로들이다. <엑스맨> <스파이더 맨>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 <슈퍼맨> <블레이드>, 심지어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 이르기까지 언제부턴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다양한 캐릭터들의 초능력 경연장이 됐다. 그것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까지 등장해 CG의 향연을 벌였으니 갈수록 블록버스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입지란 훨씬 좁아졌다. 이처럼 이제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로 기획되는 하드보디 블록버스터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할리우드의 단골 아이템이었던 <리쎌 웨폰>류 액션영화들은 이제 그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스티븐 시걸이나 장 클로드 반담이 줄기차게 출연해 완성되고 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상 거대 블록버스터 속에서 별로 할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하드보디가 사라진 블록버스터
아마도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다이하드4.0>과 가장 절묘하게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바로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 발보아>다. 이미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캅 랜드>(1997)를 통해 자신의 불굴의 남성적 이미지를 지워가기 시작한 그는 무려 15년 만에 다시 록키 캐릭터로 돌아와 세월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과거 레이건 시대의 대표적 하드보디였던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한국 극장가에서 ‘미국 액션영화’와 동격을 이루는 이름이었다. 록키와 터미네이터, 혹은 람보와 코만도라는 대표적 캐릭터만으로도 그들의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흥행 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과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와 많은 블록버스터영화들은 국가의 대외적, 대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들 미국적 하드보디 영웅을 등장시켰다. 3편에 이르러 아프가니스탄까지 건너갔던 <람보> 시리즈는 물론, 소련으로 건너가 드라고(돌프 룬드그렌)를 녹다운시킨 <록키4>(1985)에 이르기까지 이들 람보와 코만도 같은 하드보디는 냉전체제를 유지해온 중요한 정서적 바탕이 됐다.
말하자면 시리즈의 6편인 <록키 발보아>는 누가 봐도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처럼 한 노장 배우의 객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40대 나이에 다시 링에 오른 실제 복서 조지 포먼과 비교해도 그의 도전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록키 발보아>는 성공했으되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록키 발보아>는 숨을 헉헉거리는 하드보디를 보여준 가장 하이퍼리얼한 영화일 것이다. <록키 발보아>는 1편이 보여준 맹렬한 자기와의 사투와 스트리트 파이터 정신을 멋지게 되살린다. 터미네이터는 기계라 낡고 고장났다는 설정이 아닌 이상 본래의 기능과 힘을 유지해야 하지만, 15년 만에 돌아온 록키는 링도 떠났고 장성한 아들을 둔 할아버지나 다름없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록키 발보아>는 바로 스탤론의 주름진 얼굴을 긍정하려는 태도로 묘한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의 대머리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1편의 갓난아이였던 딸을 장성하게 맞이하고, “마누라는 성도 기억 못하고 애들은 말을 하려고도 안 할 테지. 혼자 식사하는 게 좋겠어?”라고 한탄하면서 여전히 이혼상태로 등장하는 <다이하드4.0> 역시 하드보디의 옛 영광을 추억하는 노스탤지어영화에 가깝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경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다이하드4.0>의 컨셉은 아예 대사로 나온다. 바로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경찰’이다. 해커들이 주고받는 전문 인터넷 용어 따위는 알 리 없고, 그저 자신의 딸을 구하고 형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그런 점에서 <리쎌 웨폰> 시리즈의 마틴 릭스(멜 깁슨)와 동류항이라 할 수 있는 그는 뉴욕 경찰관으로서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관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두 영화 모두 조엘 실버가 제작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농담을 잃지 않고, 자기보다 더 큰 적을 만나면 그보다 더 큰 객기를 부리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새끈한’ 블록버스터들이 즐비한 요즘 같은 시절에 더 큰 신선함을 선사한다. 그에게는 오로지 직진, 또 직진뿐이다. 교통 시스템 마비로 신호 체계가 뒤엉킨 꽉 막힌 터널에서 고속으로 역주행하는 그는, 타고 있던 자동차를 날려 미사일처럼 헬기를 격추하기도 하고, 대형 트럭을 운전하면서 무너져내리는 고가도로에서 F35 전투기와 믿기 힘든 일대일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아날로그 경찰인 존 맥클레인의 신화를 완성하는 것은, 정부의 관료주의가 ‘정의’를 수행하는 데 있어 명백하게 방해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몸소 해결에 나서는 것이다. <다이하드>(1988)에서 그는 테러리스트의 무전기를 손에 넣고 건물의 옥상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내지만, 여자 경찰관은 지금 사용하는 채널은 비상용이라 범죄를 신고하려면 911을 돌리라고 말한다. 배경에서 총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하는 수 없이 순찰차 한대를 건물로 보낸다. 그 순찰차 지붕에 시체를 떨어트렸음에도 경찰 부서장은 존 맥클레인이 장난전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이하드4.0>에서도 테크노 테러리스트들이 직접 완성해 전국적으로 방송하는 영상에 ‘911에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와주지 않는다면?’이라는 문구가 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여기서도 존 맥클레인은 911이라는 실체 없는 수호자를 대신하는 이름이다.
유머를 배운 더티 해리, 혹은 총을 든 호머 심슨
존 맥클레인에 대한 규정은 일찌감치 <다이하드>에서 악당 한스 그루버(알란 릭맨)의 입을 통해 다 나왔다. “당신 누구야? 어릴 때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또 한명의 미국인인가? 자신이 존 웨인, 람보, 그리고 마셜 딜런이라고 생각하는 파산한 문화의 또 다른 고아인가? 정말 우리하고 싸워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카우보이?” <다이하드4.0>이 ‘1편의 영광을 재현했다’는 중평은 아마도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공할 규모로 폭발하는 액션신들을 제외하곤, 사실 캐릭터 자체가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제목 또한 ‘쿨’하다. <다이하드4.0>은 최근 다른 블록버스터들처럼 구구절절한 부제 붙이기 경쟁에 동참하지 않는다. <다이하드4: 맥클레인의 역습> 혹은 <다이하드4: 미국의 끝에서>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그저 ‘4.0’이라는 버전의 업그레이드처럼 끝내고 만다. 제목을 소프트웨어의 버전처럼 덧붙인 것은 신선하다. 존 맥클레인은 매번 무능한 미국의 법집행 당국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는 고도로 훈련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테러리스트들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과 달리 존 맥클레인은 시대착오적이기에 오히려 매력적이다. 12년 만에 돌아온 그가 뉴욕경찰국의 사원 연수프로그램을 충실히 수행해 컴퓨터 전문가가 돼 있거나, 세월의 흐름을 막으려 머리를 심었거나, 새로운 여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존 맥클레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런 점에서 존 맥클레인의 인기 비결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형사임에도 ‘유머를 배운 더티 해리’여서이기도 하지만, TV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의 호머 심슨과도 닮았기 때문이다. 그와 헤어스타일도 흡사하게 거의 20여년 동안 두 가닥의 머리로 생활하고 있는 호머 심슨은, 미국인에게 실제 세상의 속도와는 달리 ‘세월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어떤 증거와도 같다. 군대를 다녀와도, 오랜 해외파견 근무를 다녀와도, 몇년간의 해외유학을 다녀와도 바트 심슨은 여전히 초등학생이고, 매기 심슨은 늘 젖병을 물고 있고, 호머 심슨의 도넛 같은 뱃살도 여전하다.
존 맥클레인 역시도 여전히 주책맞게 성을 바꾼 딸의 연애현장까지 쫓아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꼰대이기에 사랑한다. 그가 보수주의자라서 사랑한다기보다는 이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내에서 완전히 지워진 하드보디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드문 하드보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존 맥클레인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이단 헌트와도 닮았지만 자신의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못 다루는 기계가 없고, 미국이 아닌 전세계를 여행하며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는 이단 헌트는 존 맥클레인에 비해 다소 ‘밥맛없는’ 캐릭터다. 존 맥클레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가진 게 없고, 여전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굳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영화에서 그 스스로 말하듯 남들이 안 하니까 하는 거다. 수퍼히어로와 로봇들이 난무하는 블록버스터의 세계에서 <다이하드4.0>은 바로 그 잊혀진 ‘헝그리 정신’을 소중하게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