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 탈인간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역사에는 ‘이후’ 혹은 ‘탈’(脫)이라는 의미에서 ‘Post’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분기점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포스트 <스타워즈>’, ‘포스트 <E.T.>’, ‘포스트 <타이타닉>’, ‘포스트 <매트릭스>’, ‘포스트 <반지의 제왕>’처럼 말이다. 아마도 올 여름 블록버스터 중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영화를 고르라면 단연 <트랜스포머>다. 영화 현장에서 인간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란 과거의 농담 섞인 전망이 이 영화를 통해 명백한 현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트랜스포머>는 ‘로봇들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들만의 완성된 세상을 보여준다. 게임과 영화의 적극적인 대화 아래, 이제 적어도 블록버스터 세계에서는 그저 배우들이란 영원한 관찰자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사람이 차를 고르는 게 아니라, 차가 사람을 고르는 거야.” 아버지와 함께 첫 차를 사러간 샘 윗위키(샤이어 라버프)에게 중고차 숍딜러 바비(버니 맥)는 이렇게 <트랜스포머>의 핵심 테마를 넌지시 일러준다. <트랜스포머>에서 인간은 CG 기계들의 철저한 들러리다. 메커니즘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트랜스포머>는 디지털 배우가 할리우드를 잠식할지 모른다는 오랜 전망의 현재형이다.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1)에 출연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언젠가 영화 현장에서 배우들이 사라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탄식하고, <파이널 환타지>(2001)를 본 톰 행크스가 “인간은 더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배우들이 거기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들이 올 여름 다시 벌어진 것이다.
허공과 대화하는 배우들
<트랜스포머>의 이야기 구조는 과거 여러 다양한 변형들 중에서, 그 역사의 첫 번째 시작인 <트랜스포머 G1>(1984)에 기댄 바 크다. 여기에도 윗위키가 등장하지만 그는 <트랜스포머>의 샘과 달리 아버지를 도와 유전에서 일하며, 역시 범블비와 함께 디셉티콘에 대항해 싸우는 건실하고 독립적인 청년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트랜스포머>의 샘은 철저하게 유아적이고 심지어 여자친구 미카엘라(메간 폭스)와 있을 때는 누가 봐도 연하남처럼 보인다. 그러한 설정은 얼마간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에서 터미네이터와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의 관계처럼 옵티머스 프라임과 샘의 관계를 다소 유사 부자(父子) 관계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트랜스포머>에서 인간들이 들러리라면 그 로봇은 보호자라 할 수 있다.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등 아이작 아시모프가 <로봇> 시리즈를 통해 밝힌 ‘로봇 공학 3원칙’은 트랜스포머한테 ‘원칙’이 아닌 ‘옵션’에 불과하다. 그렇게 트랜스포머가 러닝타임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면서 그것은 배우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혼자만의 연기를 하게 만들었다.
1편보다 월등한 특수효과로 중무장한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에서 터미네이터는 T-1000(로버트 패트릭)과 수도 없이 대결하지만, 사실 CG로 만들어낸 장면들이 대부분이어서 실제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로버트 패트릭은 별로 만날 일은 없었다. <트랜스포머>도 마찬가지다. 샤이어 라버프는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허공을 보고 연기한, 혹은 가장 오래도록 말없는 자동차와 대화한 배우일 것이다. 특히 도심을 가로지르며 ‘스타스크림’에 쫓기는 연기는 악몽 같은 체험을 안겨줬다. 그것이 지상과 공중 모두에서 자신을 쫓아온다고 ‘느끼면서’ 그냥 뛰어다녔던 것이다.
배우는 물론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이제 영화 현장에는 사람을 다루는 사람보다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이 더 많다. <스파이더 맨2>(2004)로 아카데미 최고 시각효과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마이클 베이와는 오래전부터 <아마겟돈>(1998), <진주만>(2001)으로 호흡을 맞췄던 특수효과 담당 존 프레이저는 “지금껏 마이클 베이와 함께했던 작품들 중 가장 사람과 씨름하는 일이 적었다. 우리 같은 스탭들은 스스로를 영화 스탭이라고 불러야 할지,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은데 <트랜스포머>에서는 확실히 엔지니어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영화관의 스크린은 최소한의 인간성이 지워진 어떤 등사판에 불과한 것으로 돼가는지도 모른다.
‘초인’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구하리라
‘로봇’ 개념의 시초로 평가받는 카렐 차펙의 희곡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R.U.R)>(1921)에서 최초의 로봇은 기계장치로 된 인형이 아닌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인공생물이었다. 카렐 차펙이 “오, 아담, 아담! 그대는 더이상 얼굴에 땀을 흘리며 빵을 얻지 않아도 된다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로봇에 대해 인류가 가지고 있던 최초의 판타지는 바로 자신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히브리 민족의 전설인, 생명을 지닌 진흙 인조인간 ‘골렘’을 근원설화로 삼고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의식에 따르면 종이에 주문을 써서 골렘의 입에 넣거나 이마에 붙이면 생기가 들어가 진흙상이 사람처럼 움직이게 된다. 하나님이 아담을 진흙으로 만들었듯이 골렘을 진흙으로 만들어, 유대인들을 박해자로부터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골렘이나 로봇이나 ‘초인’을 향한 열망 때문에 생겨난 존재였다.
<트랜스포머>도 마찬가지다. <트랜스포머>는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치열한 고민을 보여준다. 마치 <007> 시리즈가 냉전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소련이 아닌 새로운 하이테크 테러단 혹은 국제 마약조직을 등장시키며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던 것처럼, <트랜스포머>의 영화화에 도전하며 다수 로봇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도입한 것 또한 그러한 새 영토 개척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또한 <매트릭스>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처럼 홍콩 액션 스타일을 도입하고, <툼레이더> <007 카지노 로얄> 등 여러 블록버스터들이 익스트림 스포츠에 기대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인간 액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영화에 쏟는 물량과 별개로 인간의 육체로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의 규모는 어느덧 거대한 장애물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초인’이다. <슈퍼맨> <엑스맨>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 등 최근 각광받는 블록버스터들이 하나같이 초인들의 영화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어쨌건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다. <트랜스포머>는 바로 그 사람이 연기하는 초인마저 성에 차지 않아 등장한 가장 진화된 형태의 블록버스터다.
옵티머스 프라임,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
태초에 트랜스포머가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버전으로 완성된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보여준 혁명적 시도는 바로 로봇이 독립된 자아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확산된 로봇물의 역사에서 ‘안에 타건, 밖에서 조종하건’ 간에 언제나 있어왔던 ‘조종사’라는 개념이 여기서는 없다. <트랜스포머>에서 샘은 내러티브의 진행자라기보다 관객의 눈을 대신 달고 영화에 들어가 있는 관찰자다. 아마도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 SF블록버스터가 직면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E.T.>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이방인의 휴머니즘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순수한 메커닉의 향연 혹은 디지털 배우의 힘으로만 최상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최근 몇년간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이러한 디지털 배우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시달렸다. 디지털 시스템 확산에 따른 제작 환경의 변화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상의 영역에 혼동이 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4년 아카데미상에서 피터 잭슨의 팬들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골룸이야말로 조연상감이라고 격찬했으나 후보 지명에 실패했다. 골룸을 연기했던 앤디 서키스는 이후 피터 잭슨의 신작 <킹콩>에서도 모션 캡처를 통해 킹콩을 연기했다. 그 다음해에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의 요다나 <씬 시티>의 옐로 바스터드가 또 아카데미 위원들의 감식안을 괴롭혔다. 연기력으로 인해 <트랜스포머>의 로봇 주인공들이 당장 내년 아카데미 후보에 오를 리는 없겠지만, 위원들이 앞으로 그러한 곤경에 빠질 일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