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자기 환멸에 대한 묘사 부족하고 사랑의 숭고함은 넘치는 허진호의 <행복>
2007-10-18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너무도 건실하고 숭고한 통속극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방탕한 바람둥이 남자(영수/황정민)가 간경변에 걸려 요양원에 왔다. 한 여인(은희/임수정)은 불치병에 걸려 8년 전부터 그곳에 있어왔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하지만 병이 호전된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홀로 죽어간다. 여자가 숨을 거두기 직전 남자가 찾아온다. <행복>은 이렇게 통속적으로 시작해 통속적으로 끝맺는다.

통속성은 단점이 아니다. 어떤 사랑인들 통속적이지 않으랴. 그러나 통속극이 생기를 잃는 건 상황과 감정의 통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반대편에 숭고함을 배치할 때다. 예컨대 주인공이 너무 가혹한 짐을 짊어지고 그러면서도 너무 훌륭한 사람일 경우다. <행복>의 은희가 그렇다. 불치병에 걸린 고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의연한 여인. 영수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동료 요양환자의 자살을 목격한 직후에도 “힘들지도,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다. 그녀는 죽음을 가까이 느끼면서도, 자신이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짐까지 싸서 떠나 보낸다. 그리고 그 이유를 “행복해지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허진호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런 인물을 통해 손쉽게 슬픔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허진호 영화가 우리를 매혹시킨 방식이 아니다.

숭고한 은희와 자기 환멸의 클리셰에 갇힌 영수

허진호의 멜로는 자기 환멸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사랑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풍경화였다. 사랑은 뜨겁고 충동적이며 환멸은 차갑고 지속적이다. 사랑은, 그 위에서 부유할 순 있으되, 끝내 환멸의 강을 건널 수 없을 것이다. 은희는 드물게 사랑의 능력이 환멸의 그늘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녀와는 정말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허진호는 은희가 아니라 영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영수는 잘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설명이 아니라 묘사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터뷰에서 허진호는 농담처럼 “<행복>이 무슨 이야기냐는 질문을 받을 때 호스티스영화 같다는 말을 한다”고 했지만(<씨네21> 620호), 영수는 실제로 <별들의 고향>(1974)의 알코올중독자 화가 문호(신성일)의 후예처럼 보인다. 퇴락한 시인 혹은 폐병쟁이 예술가의 풍모.

그러나 영수에게서 <별들의 고향>의 문호와 다른 차원의 예민함이나 쓰라림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그가 세상을 접하는 감각에 대한 묘사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공교롭게 전작들에서 허진호의 남자들은 모두 감각이 예민한 직업의 소유자였는데, <행복>의 영수는 클럽 주인이다). 영수는 은희를 떠난 뒤에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데, 그 행위는 자기 환멸의 클리셰다. 영수는 그런 클리셰 안에 스스로를 가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카메라가 그 클리셰에 너무 가까이 가 있다. 그 순간 이 영화가 그 클리셰로 호소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 클리셰를 성격화하려는 건지 애매해진다.

감정의 잔혹함을 무마하는 도식성

물론 보이지 않게 감정의 균열을 쌓아가는 솜씨는 여전히 탁월하다. 예컨대 이런 장면. 은희와의 행복한 동거를 시작한 직후 장터에 간 영수는 늘씬한 도우미 아가씨들이 파는 민속주 한병을 몰래 사온다. 집에 돌아온 영수는 은희가 비를 맞고 약초를 캐러 갔다온 사실을 알고 “너 애가 멍청한 거니, 궁상맞은 거니?”라고 소리지른다. 은희는 차갑게 “말 조심해”라고 대꾸한다. 이 장면 직후에 두 사람은 서로의 죽음을 지켜주기로 하는 최상의 사랑의 언약을 맺는다. 사랑은 절정의 순간에도 곁눈질을 막지 못하고, 은밀하게 파경을 예비한다. 그러나 <행복>에는 감정의 잔혹함을 무마하는 어떤 도식이 작용한다.

이상한 생략 한 가지가 있다. 은희를 버린 영수는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클럽 사장직에서 쫓겨나 찜질방을 전전한다. 간경변 재발을 짐작게 하는 각혈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건 병실장면이다. 영수는 다시 병원에 와 있다. 계절은 여름에서 어느새 겨울로 바뀌어 있고, 거리에는 눈이 내리며 캐럴이 울려퍼진다. 카메라는 거리를 내려다보는 영수의 얼굴을 창밖에서 비추고 다시 병실 안에서 그의 뒷모습을 잡는다. 수염을 오래 깎지 않았으며 심한 상처가 난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초췌하고, 그의 발바닥은 흉하게 각질이 일어나 있다. 그곳은 일반 병원이 아닌 적십자보건의료원이며 영수는 병원 밥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고, 마약중독자 같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마 그는 그 사이에 노숙자가 되었다가 이곳으로 실려왔을 것이다.

그 직전에도 시간의 건너뜀은 있었다. 오열하는 은희를 뒤에 두고 시골 집을 떠나는 늦가을 장면 다음에 바로 이듬해 여름장면이 이어져 있다. 그는 첫 장면에서처럼 열대야 소식을 들으며 운전대를 잡고 도시를 누비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신다. 그러기 위해 영수는 서울에 왔고 여기엔 서사의 생략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겨울이 되자 영수는 병든 노숙자가 되어 있다. 멀쩡한 클럽 사장에서 죽어가는 노숙자에로의 이 엄청난 전락의 과정이 왜 생략되었을까. 물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육체를 내팽개치듯이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나는 영수의 얼굴에서 그만큼 깊은 환멸을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폐병에 걸린 동료 환자의 자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릴 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생략된 전락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자기 징벌, 그러니까 죽어가는 여인을 배신한 자신에 대한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울을 보고 자신에 침을 뱉을 때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숭고함을 배신한 행위에 대한 이런 가혹한 자기 징벌은 실은 아귀가 맞는 것이다.

이 아귀는 영화의 이야기 전체의 도식과도 맞아떨어진다. 맥주 한잔과 담배를 권하는 가게 주인에게 건실한 시골 남자로 살아가는 영수가 “저요, 술, 담배, 진짜 어렵게 끊었어요”라고 말하자, 주인은 “몸엔 좋은데, 재미가 없지”라고 말한다. 은희를 버리고 서울에서 방탕하게 살아가던 영수는 밤새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 애인 수연에게 “야 이 미친년아, 넌 이렇게 사는 게 재밌냐”라고 묻고, 수연은 귀찮다는 투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어느 쪽의 말이 맞을까. 이 게임은 싱겁다. 그것은 은희와의 시골에서의 나날은 더없이 아름다운 반면, 도시에서의 생활은 소음과 중독과 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너무 착하고 건실한 사랑영화

<행복>에는 많은 거짓말이 있다. 동준은 영수의 망한 술집을 인수하면서 “앞으로 친구끼리 돈 거래는 하지 말자”라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지만 서울로 되돌아온 영수에게 다른 술집을 인수해서 맡긴다. 수연은 영수가 요양원으로 떠나기 직전에 찾아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자 “우리 끝난 거야”라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그가 건강을 회복한 뒤에 “너, 기다리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무엇보다 영수가 은희에게 “너 아픈 거 보니까 내가 죽을 거 같더라. 나 이제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아”라고 말하고 얼마 뒤에 그녀를 떠나버린다. 자신의 말에 온전히 책임을 지는 사람은 은희뿐이다. 중요한 건 거짓말이 아니라, 이들의 말이 바뀌는 계기다. 그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놓는 건 은희와의 시골에서의 나날이다. 영수가 서울로 되돌아와 살기 시작하자 다시 그 반대가 된다. <행복>에는 관습적인 대립항이 작용한다. 은희가 대변하는 시골-가난-근면-순정-정직-고요-자기애의 계열과 영수로 대변되는 도시-풍요-게으름-문란-불신-소란-자기 환멸의 계열이다. 전자를 묘사할 때 카메라는 고요한 전원 풍경과 순박한 사람들을 비추고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진 뒤, 풀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을 언덕에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이 울려퍼지는 장면은 그것만으로도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 영수가 비겁한 말을 늘어놓으며 떠나려 할 때, 은희는 “개새끼, 니가 사람이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라고 독하게 말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견고한 아름다움을 훼손하진 못한다. 반면 영수와 그가 대변하는 것들은 은희에게 멀어질수록 어둡고 추해진다.

이렇게 아귀를 맞춰놓을 때, <행복>은 너무 착한 영화가 된다. 영수는 은희의 시신 앞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요양원으로 돌아간다. 영수의 환멸은 반성의 대상이 되고, 요양원에 내리는 눈처럼 깨끗한 은희의 순정은 칭송된다. 이 결말은 허진호의 영화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실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좋아하기 힘들어진다. 그가 사랑에 매혹되면서도 여전히 환멸의 편에 서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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