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희순] “본의 아니게 겸손해지는 인생이다”
2007-12-05
글 : 오정연
사진 : 이혜정
<세븐데이즈> <얼렁뚱땅 흥신소>의 박희순

<남극일기> 개봉 직후 박희순은 영화에 쏟아진 온갖 혹평에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게 네티즌”이라며 혀를 내두른 바 있다. 그런 그가 요즘은 포털 사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곤 한다. <귀여워> <가족> <남극일기> 등에서 악역 전문 배우로도 통했던 그는 현재 “정신없이 소중하신”, “청초한 외모의”, “박희순 오빠” 등 어마어마한 수식어에 휩싸여 있다. 시간 순서대로 보자면 독특한 구성과 전개로 소수의 열혈팬을 만들어낸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이후 역시나 독특하고 빠른 전개로 관객을 흡입하는 스릴러 <세븐데이즈>가 있었다. 보물을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비열한 인간인 줄 알았으나 나름의 사정을 간직했음이 밝혀지는 조폭 민철로, 한 발짝 뒤에서 오랜 친구를 지켜주는 모자라지만 정감어린 비리형사 성열로, 불같은 네티즌의 호기심을 뒤늦게 달궈버린 이 남자. 드라마 촬영과 함께 수십 개의 온·오프라인 매체 인터뷰를 병행했고, 전날까지 <얼렁뚱땅 흥신소>의 마지막 촬영과 뒤풀이에 참석했다는 그의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앞으로 그는 그처럼 얼떨떨한 마음으로 급작스런 유명세를 더욱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헨젤과 그레텔> <바보> 등 그가 출연했으나 개봉 기회를 잡지 못했던 영화들을 통해 박희순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주시길. <얼렁뚱땅 흥신소>와 <세븐데이즈>가 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12년간 극단 목화에 몸담았고, 지난 5년간 10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의 내공은 좀더 느긋하고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얼렁뚱땅 흥신소>의 낮은 시청률과 열렬한 인기도 놀랍지만, 오랫동안 정극을 했던 배우가 그렇게 TV 드라마 출연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다.
=예지원이 <얼렁뚱땅 흥신소>의 함영훈 PD와 친한 사이였다. 또 건달 역할에, TV인 것도 걸려서 계속 도망다녔는데, 막판에 (예)지원이 (이)선균이며 (임)원희까지 동원해서 설득했다. 건달이라지만 러브라인도 있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니, 인간적인 매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지원이한테 한턱 내야 할 텐데.

-영화에 비하면 촬영 속도도 빠른 편인데.
=<세븐데이즈>가 더 빨라서 괜찮았다. (웃음) 문제는 다른 캐릭터들은 만화처럼 통통 튀고 재미있는데, 나만 혼자 무게를 잡으려니까. 멋있으면서도 양면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어려웠다. 드라마라는 게 참 미묘해서, 남자들이 들으면 닭살 돋는 멘트들이 많더라.

-혹시 그거? “당신의 입술은 생각보다 달콤했어.”
=그건 감독님도 빼자는 걸 내가 하자고 그랬다. 원래 대본에 있는 대사였는데, 그게 지원이가 연기한 희경에게 정을 떼도록 만들려는 야비한 말인 건 분명한데, 말 자체를 좀더 슬프게 하면 캐릭터의 매력이 더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그전에 온갖 닭살 멘트 다 했는데 그것만 안 하면 그것도 이상하잖나.

-<세븐데이즈>의 원신연 감독에 따르면 예전 제작진이 <목요일의 아이>라는 이름으로 찍었던 시나리오에는 성열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이고 전형적이었다더라.
=일단 당시 시나리오에 비해 <세븐데이즈>에는 성열의 분량이 훨씬 많아졌다. 단선적인 캐릭터가 복합적이 되고, 보여줄 것도 많아지고. 그때는 성열이 유괴사실을 모르는 채 흐지부지 끝나는 거였는데. 예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자잘한 재미도 많아지고, 중요한 반전이 스포일러로 미리 알려져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됐다.

-원래 본인의 성격과 성열은 많이 다를 것 같다.
=다르다. 그렇게 멋있지 않지. (웃음)

-성열처럼 능글맞고, 구시렁거리는 건 잘 안 할 것 같다는 얘기다.
=나도 구시렁거린다. (웃음) 재밌는 얘기 있으면 좌중을 휘어잡고 막 떠드는 게 아니라 옆사람 붙잡고 작게 시도하기도 하고.

-<세븐데이즈>의 시나리오에도 지연에게 성열이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고, 실제 찍기도 했다던데.
=그게 은영에게 딸이 유괴됐다는 말을 듣고, 성열이 굉장히 쑥스럽게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널 짝사랑했다, 말하는 장면이다. 유독 최영환 촬영감독님이 그걸 닭살스럽다고 되게 싫어했다. (웃음) 그 때문이었는지 그 대사만 빠졌더라. 빼길 잘한 것 같다. 그 신 자체에서 성열의 사랑이 보여지니까 굳이 말을 안 해도. 그런 게 또 한국 남자인 것 같고.

-그 정도까지 도와주는데 누가 좋아하는 걸 모르겠나. 편집실 취재 갔다가 그날 저녁 때 박희순씨가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편집실에 자기 분량 보면 떨리지 않나.
=내 부분 작업하려고 하면, 나 나가면 하라고 그랬다. (웃음) 촬영 때는 너무 행복하고 재밌어서 감독님께 “제 분량 다 잘려도 좋다”고 말했지만 막상 편집할 때 되니까 굉장히 두근거리더라. (웃음) 그래도 결국 잘려나간 신이 거의 없었으니 너무 고맙다. 소문에 의하면 신민경 편집기사가 성열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서 자르려고 하면 다 막았다는 얘기가 있더라. (웃음)

-여러 인터뷰를 보면 애드리브 이야기가 많다.
=내 전작들은 대체로 무거워서 그럴 수 없었지만, 이번 영화는 내가 자유로워야 할 것 같아서 감독님께 미리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되게 개방적이어서, 맘대로 하라고, 글을 써와도 된다더라. 어떤 대사는 감독님이 현장에서 애드리브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연과 성열이 열쇠수리공 불러서 아파트 문을 열려다가 안 되니까, “직업의식이 없어”라며 수리공을 구박하는 장면. 그게 윤진씨와 내가 처음 함께하는 첫 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한 뒤에 뻘쭘하게 있다가 슛 들어가면 갑자기 친한 척해야 하는 상황. 근데 처음에 감독님은 성열을 계속해서 방방 뜨는 식으로 설정했다. 나는 그 부분을 좀 틱틱거리기도 하고, 꿍얼거리는 캐릭터로 생각했는데 서로 의견이 달랐던 거지. 감독님 버전, 내 버전으로 찍었고, 현장 편집본에는 감독님 버전이 있었는데, 완성된 걸 보니 내 버전이 있더라.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심각한 영화 속에서 성열의 캐릭터는 유일하게 밝은 구석 아닌가. 부담이 있었겠다.
=근데 감독님이랑 궁합이 잘 맞았다. 원신연 감독은 어떤 요구사항이 있으면 뜸들이지 않고 즉석에서 “성열이가 이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성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 거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성열이가 이렇다, 저렇다,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경우 편집에서 잘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여러 ‘기술’을 구사하다가 흐름을 깰 수도 있어서 수위 조절이 힘들다.
=고민이 많았다. 너무 웃음 위주로 가서 해가 되도 안 되지만 김윤진씨의 무거운 분위기에 말리면 영화가 지루하지 않겠나. 줄타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감독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일단 저지를 수 있었다.

-너무 과하다며 제지를 당할 때도 있지 않았나.
=후반부에 성열이 용의자를 붙잡으려고 할 때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를 막 질렀는데, 테이크 끝나자마자 최영환 기사, 원신연 감독, 김윤진씨 셋이서 공격을 해대더라. “에이, 너무 튀려고 연기를 한다”, “열연을 하지마, 응?”, “대충해, 우리 다 대충하잖아”. (웃음) 그렇게 편하게 얘기해주니까 나 역시 “알았어, 그만 좀 해, 창피해 죽겠어”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만일 심각하게 감독이 옆에 와서 “감정 좀 죽여주시구요” 이랬다면 서로 불편했을 텐데.

-원신연 감독과 심각하게 의견이 달랐던 적은 없었나.
=별로 없었다. 트러블이라면 오히려 윤진씨와 있었지. 윤진씨는 표현하고 싶은 심정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걸 못하게 하니까. 난 중간에서 그랬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줘~. 감독님 삐치잖아, 어차피 편집할 때 감독님이 그거 쓴단 말이야. (웃음)”

-무대인사 다니면서 박희순씨가 박수를 더 많이 받아서 김윤진씨가 삐칠 정도였다던데.
=영화 상영 전에 하면, 윤진씨를 보고 소리를 지르는데, 상영 뒤에는 내 캐릭터를 알게 되니까 많이들 좋아해주시긴 하더라.

-이런 걸 언제 찍었나 싶은 것도 있지 않았나.
=현장편집을 전부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리 움직였으니까. 내가 영화에 나올 때 표정이 어떤 게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이런 표정도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일단 멋있게 나왔지. 최영환 기사 지론이 무조건 남자배우는 멋있게, 여자배우는 예쁘게라니까. (웃음)

-부모님께서 아들이 멋지게 나와서 정말 좋아했겠다.
=일단은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정말 좋아하신다. 영화는 두번 보셨다. 어른들 보시기에 화면이 너무 빠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재밌어 하시더라.

-게다가 전작처럼 악역도 아니고, 밝고 긍정적인 인물이니.
=<러브토크> 보신 어머니께서, “악역이 차라리 낫다, 그게 뭐니” 그러시더라. (웃음) <세븐데이즈>를 처음 볼 땐 내가 다칠까봐 액션신마다 조마조마했는데 두 번째는 친구들이랑 즐겁게 보셨다고. 하여튼 어머니는 무조건 아들이 많이 나오면 좋아한다. (웃음)

-<러브토크>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거기서는 굉장히 답답해 보였다. 어머니가 싫어하신 게 이해가 간다.
=그저 내가 캐릭터 잡기를 내가 가진 몇 가지 성격 중 다운된 상태가 지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뿐이다. 무기력하고 답답한 시기의 나. 거기도 분량이 훨씬 많았는데, 40% 정도 잘렸다. 답답한 면모만 남아서 속상하긴 했다.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연기를 못한다고 보는 분들도 있었다.

-그럴 땐 억울하겠다.
=중요한 스트레이트는 누구나 거기에 힘을 줘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잽을 얼마나 잘 구사한 다음에 스트레이트가 나오느냐가 중요하다. 잽들이 편집에서 다 사라져버리면 배우의 캐릭터 구축에서 손해가 막심하다. <세븐데이즈>는 작은 잽들이 다 살아 있어서 스트레이트가 더 좋아 보였던 영화다.

-<2001 이매진>에 나왔더라.
=<남극일기>까지만 해도 <2001 이매진> 배우라는 얘기를 더 많이 들었다. 장준환 감독이랑 제대로 영화를 함께 다시 해봐야 할 텐데. 예전엔 내가 친구 덕을 보려고 했는데, 이젠 그 친구가 내 덕을 보려고 한다. (웃음)

-그 영화의 현장은 정말 웃겼을 것 같다.
=나야 뭐 정말 난생처음 영화연기였으니 신기했고. 촬영은 봉준호 감독이었는데, 두 거장을 첫 영화에서 만났으니. 열흘간 촬영하면서 내내 밤을 샜던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카메라 잡고 졸고, 감독은 레디 액션 부른 다음에 졸고. (웃음) 아, 거기 총 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장준환 감독이 겁이 되게 많아서는, 레디 부른 다음에 귀를 두손으로 막고 눈을 꼭 감은 채로 “액션!” 이러는데, 그게 어찌나 웃겼는지. (웃음) 그래도 그 영화처럼 진지하고 독특하고 웃긴 블랙코미디를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아직 못했다.

-장준환 감독과는 <2001 이매진> 이후 한번도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나.
=뮤직비디오.

-앗, 장준환 감독과 문소리씨가 사귀게 되었다는 그 뮤직비디오!
=(문)소리랑 셋이서 술도 많이 먹었다. 둘이 사귄다는 것도 나만 알고 있었다. 셋이서 술 먹다가 느낌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서너 시간 동안 계속 추궁했더니, 준환이는 거의 고백 직전까지 갔는데 소리는 끝까지 잡아떼면서 화를 내더라. 결국 그냥 알았다고, 난 사귀는 걸로 알 테니까 그냥 너희도 모른 척하라고 넘어갔다. (웃음) 신혼집에 놀러오라는 말은 들었는데, 올해 이래저래 바빠서 아직도 못가봤다.

-어쨋거나 이젠 나쁜 남자 혹은 조폭 전문배우라는 말은 쑥 들어가겠다.
=사실 개봉 남겨둔 영화 중에 한편 더 있다, 악역으로 나오는 거. (웃음) 하지만 박희순을 몰랐을 때의 악역과 알았을 때의 악역은 확연히 다르다. 저 사람이 연기변신을 했구나, 와 박희순 쟤는 원래 나쁠 거야, 는 천지차이니까.

-그래도 <세븐데이즈>와 <얼렁뚱땅 흥신소>에서는 혼자만 멋있게 나온 셈 아닌가. 속된 말로 ‘따먹는 연기’랄까. 어떻게 보이면 본인의 캐릭터가 살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극단 목화의 시스템 자체가 처음 대본이 연습을 통해 계속 바뀐다. 배우가 연습 때 무얼 준비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커지고 작아진다. 매 연습이 오디션이다. 오태석 선생님이 늘 하는 말씀이 “잘나갈 때 조심해라”였다. 공연을 하다보면 반응이 오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힘을 주면, 그러니까 ‘따먹는 데’ 익숙해지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래서 관객반응이 대박나는 부분은 오 선생님이 호흡이나 대사를 바꿔버린다.

-12년이나 있으면서 오태석 선생님이 예뻐해 주셨던 모양이다.
=나중엔 조연출 비슷한 역할까지 했다. 후배들과 연습도 맡아하고. 선생님이 이용할 여지가 많으니까 잡아두려고 했겠지. (웃음) 선배들이 하나씩 나가고, 내가 나갈 차례였는데, 임원희며 유해진이 나가다보니까 날더러 “애들 관리 못했으니까, 넌 몇년 더 있어” 이러시더라. (웃음)

-그래도 용케 박차고 나왔다.
=같은 작가, 같은 연출, 같은 공간, 같은 배우들과 하니까 아무리 변신을 해도 비슷한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더라. 나와서 처음엔 <록키 호러 쇼> 같은 뮤지컬을 했는데 그때 이진아 연출을 만나서 전환점을 맞았다. 예술적인 연극을 하다가 대중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달까. 나는 항상 엘리베이터 하나없이 한 계단씩 밟아온 것 같다. 방심할 만하면 태클이 들어왔다. 출연작이 개봉을 안 한다든지. (웃음) 본의 아니게 겸손해지는 인생. 지금도 뭔가 하나를 고집하기보다는 많은 걸 경험하면서 커지고 싶다.

-2002년부터 영화를 했는데, 목화를 그때 나온 건가.
=다른 선배들은 왔다갔다 할 동안 난 12년간 한번도 외부작품을 안 했고, 그냥 선생님께 3년 정도 바람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근데 영화에서도 자리를 못 잡으니 다시 돌아가기도 창피하고 애매하더라.

-이제는 돌아갈 수 있겠다.
=아직 멀었다. (웃음) 좋은 작품,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이번에 특히 좋은 감독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오태석 선생님이 멍석을 깔아줬을 때 내가 신나게 놀듯이 영화에서도 그런 스승 같은 분을 만나고 싶으니까. 그중 하나가 원신연 감독님이고. 예전에 (송)강호 형이 “시나리오 소용없다, 감독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던 게 뭔지 알겠더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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