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윤석] “동네에서 가장 야비한 개가 잔인한 들개와 싸우는 얘기다”
2008-02-19
글 : 장미
사진 : 이혜정
<추격자>의 쫓는 전직 경찰 김윤석

압도적이다. <추격자>를 보고 나면 괴물 배우가 또 한명 탄생했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윤석이란 이름을 발굴한 <타짜>(2006)의 아귀가, 그 이름을 잊지 못하게 만든 <천하장사 마돈나>(2006)의 동구 아버지가, 혹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세상 무서울 게 없던 드라마 <있을 때 잘해!!>(2006)의 하동규가, 평범해서 더욱 마음을 당겼던 <즐거운 인생>(2007)의 성욱이 훌륭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추격자>에서 김윤석은, 우리가 의심스레 눈을 비비는 사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는 전직 경찰. 김윤석 자신의 표현대로 중호는 합법과 비합법의 세계를 오가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개판인 놈들을 사회가 잡아가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이 사내가, 생을 건다는 말 따윈 모르는 하이에나 같은 그가, 경찰도 잡지 못한 “그 새끼”를, 온몸이 부서져라 추적한다. 처음에는 자기 관리하의 여자를 잡아가서. 나중에는 그 여자의 딸아이가 불쌍해서. 결국에는 진동하는 피냄새를 쫓는 듯 본능적으로.

중호는 착한 추격자가 아니다. 눈동자만 굴려도 소름이 돋는 연쇄살인마 영민과는 다르지만 꼭지가 돌면 손부터 날아가는 그도 엄연히 “나쁜 놈”이다. 악역 전문 배우라는 꼬리표? 김윤석은 단언한다. “야비함을 넣지 않고 선한 캐릭터를 만들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 역할은 하고 싶지가 않다.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장담한다. “성욱이도 그렇고, 아귀도 그렇고 다 내 안에 있으니까 하는 거다. 동구 아빠도 마찬가지다.” 속엣것을 긁어내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흔치 않은 배우. 김윤석은 자기 소유의 감정이 아니면 거짓이라 생각하는 경험주의자다. 밤새 차를 몰고 내달리는 게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좋다지만 ‘패밀리맨’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게 사랑스럽단다. 생에서 얻는 교훈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작은 손놀림에서도 연기의 부스러기가 묻어나는 연극 무대 출신의 늦깎이 영화배우가 <추격자>로 선 하나를 넘었다. 그가 끈기와 오기로 단단하게 벼려진 배우라는 사실을 아는 이상 걱정할 건 없다. 이 겁없는 남자가 어디까지 달려가는지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거칠게 말하면 이 작품이 첫 주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는지.
=많이 다르다. 나홍진이라는 자기 색깔이 분명한, 아주 신선한 신인감독하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일주일 정도 찍고 나서 이 사람은 끝까지 보호해야겠구나, 이 사람의 미학적 감성이 주변 압박에 흐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서포트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자기 확신이 없었다면 그 정도로 연기할 수 없었을 텐데.
=그게 대화의 결과다. 크랭크인하기 전에 엠티를 갔다. 감독과 나, 감독과 하정우 따로따로. 그날 밤 콘도에서 계속 대화를 나눴다. 콘티와 대본을 놓고. 그 시간이 굉장히 좋았다. 하정우하곤 술도 안 먹고 계속 대화했다는데 나하곤 술을 좀 많이 먹어가지고. (웃음)

-<즐거운 인생> 찍고 나서 “하정우랑 <추격자> 촬영하고 있다. 내용은 말해줄 수 없지만 굉장히 핫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보니 에너지가 대단하더라.
=내가 거짓말 안 하잖나. (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
=굉장히 차가웠다. 용광로 같은 핫함이 있더라도 건드리기만 해도 그냥 뜯겨나갈 정도의 차가움이, 비수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감독은 중호가 어떤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던가.
=어떤 인물이라고 이야기 안 한다. “중호는 무조건 선배님입니다.” 대신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하자. 이 인물이 마지막에 도덕적 성찰 같은 걸 얻는 건 아니다. 그냥 생사를 넘나드는 어떤 상황을 만난 거다. 도덕? 그런 거 생각할 시간 없다. 중호는 이놈을 만나기 전에 하류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나름 잔대가리는 굴릴 줄 안다. 싸움 잘하고. 있는 놈 거 뺏어서 가지면 되는데. 얘는 이유없이 죽여버리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익힌 얄팍한 방법들이 무용지물이 된 거다. 무인도, <캐스트 어웨이>야. (웃음) 그러니까 동네 개들 중에서 제일 성질 더럽고 못된 개였다가 멧돼지가 한 마리 내려온 거지. 들개나. 맞장 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거다. 거의 짐승적인 본능이다. 지면 안 돼. 여기서 물러나면 안 돼. 거기에 도움이 됐던 게 형사를 한 전력이겠지.

-“아귀 같은 역할을 자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는데 <추격자> <타짜> <천하장사 마돈나>를 함께 놓고 보면 역할들이 하나같이 강렬하다.
=캐릭터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현실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희한하게 악역을 잘 쓰는 것 같아. 그에 반해 선한 역할은 참 못 쓰는 것 같아. 나는 어정쩡한 것보다는 현실감있는 걸 좋아하고, 그러다보니 악역이 되는 거고. 그치? 이젠 야비하다, 이기적이다, 그런 말은 악역을 묘사하는 표현에서 빼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야비하고 이기적이지 않나.

-혹시 중호라는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 덧붙여 해석한 바가 있다면.
=그냥 착 와닿았다. 나이 사십쯤 되니까 어떤 놈인지 알겠더라고. 앞으로도 따로 공부해야 하는 역할은 되도록이면 안 맡으려고. 공부해서 되는 게 절대 아니니까.

-“연기를 할 때 나에게서 다른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그런 순간이 있었나.
=음, (잠시 생각하더니) 있었다.

-어떤 얼굴이었나.
=절실함이었다. 어린애 같은 순수한 절실함이 슬쩍슬쩍 나한테 묻어났다. 남들은 못 느끼고 나만 느낀다. (웃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중호가 미진의 딸이 없어져서 찾으러 갔을 때였다. 골목길에서 아이를 발견하곤 달려가기에 앞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표정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건 사람 김윤석이 약간 드러나는 부분인데. 나는 굉장히 큰일이 벌어지면 침착해진다. 평소에 잘 흥분하고 말도 이렇게 막 하다가 정말 큰일이 생기면 이상하게 &#52517; 가라앉는다.

-20시간 연속으로 달리는 장면을 찍었다고 들었다.
=재미있는 게 뭐냐면, 이를테면 중호가 지영민이랑 만나서 뛰는 장면을 일주일 동안 찍었다. 오늘 찍고 내일 찍고 나흘째 찍을 때쯤 되면 가장 지쳐 있지 않겠나. 이놈을 잡아 족친다, 그 의지 하나만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찍어야 한다. 몇번 찍어. 근데 감독이 이상한 이유를 대서 다시 뛰게 만들어. 이렇게 해서 그 상태의 몸을 만들어. 그걸 우린 눈치채지. 그런데 우리도 잘 안 나오니까. 이때는 이런 무식한 방법밖에 없지. 안 그래? 지친 척 연기하는 것이 한계가 있잖아. 우린 속으로, 알았어, 내 몸을 한번 혹사해보자.

-치고받는 연기야말로 호흡이 안 맞으면 힘들지 않나. 어느 인터뷰에서 하정우와는 “정말 한몸 같았다”고까지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해보겠다. (기자의 팔을 힘을 실어, 그러나 아프지 않게 잡더니) 안 아프지? 최선을 다해서 쥐고 있는 것 같은데 안 아프잖나. 목을 조르더라도 진짜 하면 큰일난다. 무식하게 치고받는데도 다 그렇게 했다. 목 조르고 발로 밟고 그런 것도. 서로에 대한 배려나 노력이 없으면 힘들다.

-하정우랑은 술은 거의 안 먹고 대화만 했다고.
=술 먹었다. 많이 먹을 시간이 없었지. 다음날 오후 6시가 집합이니까 한 시간 만에 소주 두병씩 바바박 먹고 집에 들어가서 자고. (웃음)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점이라면.
=그런 건 있었지. 전체 영화가 거의 1박2일을 담기 때문에 한 시간마다 연결, 연결이잖나. 그런데 순서를 뒤집어 찍었단 말이지. 이 조각이 여기서 들어가는 게 맞는 건지. 나는 사건이 종결되고 난 다음에 십자가 보는 게 첫 장면이었다. 아, 이거 어떡하니. 앞장면은 찍지도 않았는데. 계속 감독하고 이야기하고.

-“거친 장면들을 제대로 표현되려면 정교한 계산하에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연기하는 대상에 적절히 발 담그고, 적절히 발을 빼는 태도 같은 게 느껴지더라.
=뭐, 광기의 연기, 몰입의, 열정의 연기라는 말을 들었던 연기자들에겐, 그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당신들은 못 보지만 굉장히 차가운 머리와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절제가 안 되면 그건 뭐.

-그런 균형은 어떻게 잡나.
=이건 영화고 연기다. 실제가 아니다. 한쪽은 항상 비워놔야 한다. 차갑게 나를 바라봐야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열심히 광기를 연기했는데 쟤 왜 저러냐, 왜 저렇게 눈에 힘을 주냐. (웃음) 그게 적재적소에 표현이 안 맞았다는 거 아니겠나. 안 그러려면 얼마나 냉정한 이성이 있어야 하겠나.

-어떤 배우들은 캐릭터에서 쉽사리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나는 그렇지 않다. 자연인 김윤석은 절대로 배우 김윤석에게 지지 않는다.

-일생일대의 하루를 보낸 중호는 그 뒤 어떻게 살았을까. 절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건 모르지. 사람의 의지를 그렇게 믿지 않는다. 사람은 환경에 이긴 적이 없으니까.

-다음 작품은 결정됐나.
=아니, 아직 결정 안 됐다. 이 영화 개봉하고 난 다음에 선택하고 싶다.

-바로 전작인 <즐거운 인생>은 이준익 감독의 연출작 중 제일 흥행이 안 됐는데.
=왜 안 됐지? (웃음) 흥행이 왜 잘되고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나는 성욱 역할을 굉장히 좋아한다. 밋밋? 나는 밋밋하지 않다고 본다. 많은 것이 숨어 있다고 본다. 다른 역할과 같이 보면 튀지가 않지? 이 친구는 강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나는 그런 연기가 좋다.

-인터뷰를 보면 아이나 가족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좋으니까. 보고 싶고. 애들만 봐도 그냥. (웃음) 내가 진짜 아버지가 됐네, 보고 느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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