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차인표] 흔들림 없는 진실된 자연인
2008-05-16
글 : 강병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크로싱>의 배우, 차인표

솔직히 차인표에게 궁금한 건 없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아내인 신애라와 함께 쌓아온 선행들이 모든 질문의 답변일 것이다. 그런 차인표에게 <크로싱>을 촬영하면서 보고 느꼈던 바를 듣는다고 한다면, 과연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에게 <크로싱>은 신의 뜻이었거나, 인간 차인표가 가진 가치관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너무나 따뜻하고 온유한 이야기만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게 차인표의 본령이라면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차인표란 배우를 이야기할 때, <크로싱>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했다. 차인표가 연기한 <크로싱>의 용수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다. 두 아이를 입양하고,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품는 실제의 차인표와 오롯이 겹치는 인물이다. 아직 <크로싱>은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의도만큼은 미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아침, 차인표는 기도를 드렸다고 말했다. “거짓말 안 하고, 모르는 사실을 아는 거처럼 이야기 안 하고, 헛소리 안 하고, 영화를 잘 보이게 하려고 잘 모르면서 과장 안 하고, 아는 대로 진실만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잠깐씩 웃던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거짓말이든, 헛소리든, 과장된 수사든,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였다.

차인표의 작품선택은 종종 의심받는다. 그가 한편의 영화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배우가 아닌 인간 차인표의 선택일 거라 생각한다. 인간 차인표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 신애라의 자상한 남편, 그리고 한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입양한 아빠. 직함 또한 무수하다. 어린이 구호기구 컴패션의 홍보대사, 유니세프 카드 후견인, 중앙아동학대예방센터 홍보대사, 굿네이버스 남북 어린이 희망대사 등등.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시작으로 <완전한 사랑>까지 여러 흥행드라마의 주역이었지만, 그의 연기보다는 선행이 먼저, 더 많이 주목받았다. 그래서 차인표는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왕초> <홍콩익스프레스> 등에서 보여준 가볍고 거친 모습보다는 영화 <짱>이나 <보리울의 여름>에서 연기한 선한 인물로 더 많이 기억된다. <크로싱>은 그의 27번째 선택이다. 영화로만 헤아리면 8번째다. 소재는 북한의 어느 가족이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사연이다. 가족을 지키고픈 아버지의 이야기인 <크로싱>의 의도는 전세계를 떠돌고 있는 30만명의 탈북자들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은 이 영화 역시 배우 차인표보다는 인간 차인표가 선택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크로싱>의 용수를 연기하는 것,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의 선행이었을 거라 믿는 것이다. 아마 차인표는 <크로싱>을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을 거라고. 마치 신이 그에게 내린 소명인 듯 받아들였을 거라고. 인간 차인표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배우 차인표의 판단은 달랐다.

“모든 걸 감안해볼 때 피하고 싶었어요. 왜 이 영화가 하필 나한테 왔는지, 너무 부담되더라고요.”

흥행을 담보할 수 없는 영화의 소재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접속> <약속> <쉬리> <미술관 옆 동물원> <공동경비구역 JSA> 등 흥행작 대신 결과적으로 극장에서 외면받는 영화들을 선택해온 차인표다.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거나, 당시의 경쟁작 때문이거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그에게 대표적인 영화흥행작은 없다. 그러니 이제는 흥행작을 고려할 때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을 주저한 이유는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 때문이었다. “꼭 만들어져야 할 영화라는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참여했으면 한 거죠. <크로싱>은 주연배우와 투자자가 기둥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예요. 하지만 나로서는 투자자도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고, 영화의 좋은 뜻을 관객에게 공감시키기도 어려울 것 같았어요.” 차인표는 스스로를 “드라마에서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계에서는 힘이 없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사실, 내가 많은 고려를 할 만큼 작품이 들어오지는 않아요. 주어진 것 중에서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뿐이에요.” 하지만 그는 <크로싱>을 연거푸 거절하면서도, 탈북자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찾아나섰다. 관련 다큐멘터리와 기사들을 보던 중 그가 느낀 건 불가피한 책임감이었다. “만약 내가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그 자료들을 보지 않았다면 면죄부가 있는 거겠죠. 아예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이 문제가 어떤 건지를 안 이상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런 사실을 보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는 거잖아요.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로서는 다른 대답이 없었던 거죠.” 물론 그의 고민을 다르게 넘겨짚을 수도 있다. 혹시 선행의 이미지가 굳어진다는 두려움은 없었을까. 인간으로서는 모르겠지만, 배우로서는 좋을 리만은 없는 이미지다. 그 역시 “소에 원산지가 찍히듯 내 이미지가 치우쳐 있어서 제안이 들어오는 캐릭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혹시 두렵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크로싱>은 그의 한계를 더욱 좁힐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고 말하면 이건 10대의 반항기 같은 거겠죠. 그런데 이제는 제가 선택한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를 걱정하는 시기는 지난 것 같아요. 나이도 그렇고…. <크로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배우이자, 세 아이의 아빠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가치관으로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이냐는 거니까요. 저의 가치관에서 <크로싱>은 꼭 한번 건네야 하는 이야기였어요.”

그는 ‘선택과 집중’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선택한 이상 흔들리는 일은 없다는 듯이, 단호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차인표에게 이전의 갈등은 사라졌다. 막연하게나마 탈북자의 입장에 서보겠다는 심정으로 스탭들과 몽골 사막을 헌팅했고, 그곳에서 탈북자들이 보았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실제 탈북자에게 함경도 사투리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크로싱>은 2007년 7월2일 용수와 그의 아들인 준이(신명철)가 자전거를 타는 장면으로 첫 촬영을 시작했다. 용수의 옷을 입고, 머리를 한 차인표는 “영화 촬영하는 동안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이전처럼 재벌 2세 같은 남자가 아니잖아요. 갈 곳이 없는 남자고, 지위로 따지면 가장 밑바닥인 사람이죠. 그런 사람을 연기하면서 배우랍시고 기득권을 주장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필요할 때 일하고, 언제 끝나냐고 재촉하지도 않으려 했어요.” 특히 준이를 연기한 신명철군과의 만남은 차인표가 용수에게 빠져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충북 영동에서 자란 이 소년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작은 연못>이 필모그래피의 전부인 배우. 대본 연습을 하고 있던 차인표의 눈에 ‘까무잡잡하고 조그맣고 삐쩍 마른’ 소년이 보였다. “수줍어서 눈도 못 마주치더라고요. 한번 안아봤는데, 예전에 필리핀 빈민촌에서 만난 아이를 안았을 때의 느낌이었어요. 뼈랑 가죽밖에 없다고 할까요? 명철이가 원래 마른 체형인데, 촬영 내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이어트를 하더라고요. 친구처럼 지낸 건 아닌데, 틈만 나면 껴안고 그러면서 스킨십을 많이 했어요.” 차인표가 명철이를 만나면서 아들인 정민이를 떠올린 건 당연할 것이다. <크로싱>의 초반부, 용수와 준이가 함께 축구를 하다가 비를 맞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하는 준이의 모습에서 차인표는 아들에게 꼭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돌멩이도 장난감이 되고, 비오는 것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 아이가 자라고 있는 강남에서는 비와 자신 사이에 너무 많은 게 있죠. 닌텐도도 있고, 학원도 있고. 배고픔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다이어트를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누구나 하는 말이다. 아이가 있는 배우가 가족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에 출연한다면 누구나 할 생각이다.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인표는 종종 준이의 입장에서 영화의 내용과 공간을 살펴봐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로싱>은 사실 용수보다도 준이의 입장이 이입되는 영화다.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간 용수는 뜻하지 않게 탈북자 신분으로 한국을 찾는다. 가족과 이별했지만, 어쨌든 그는 안전한 품 속에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를 찾아 떠난 준이의 여정은 위험하고 고달프다.

“몽골 사막을 갔을 때, 과연 여기서 사흘을 버틸 수 있을까 싶었어요. 다 자란 튼튼한 성인이라도 살 수가 없겠더라고요.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고, 물도 없고. 게다가 아무런 희망도 없잖아요. 전세계 어디에서도 오라고 하는 곳이 없는데. 저 같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가 않을 거예요. 이런 곳에서 아이는 어떨까요? 어른이 사흘을 못 버티는데, 아무리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도 아이의 입장에서는 하루를 버티기 힘들 것 같았어요.”

보름간의 한국 촬영이 끝난 뒤 제작진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촬영은 거의 이야기의 순서와 비슷하게 진행됐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몽골로. 용수가 중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크로싱>의 이야기는 급박해진다. 용수가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벌목장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돈을 벌던 용수는 중국 공안을 피해 도망치던 도중에 브로커의 제안을 받고 독일대사관으로 진입한다. 용수가 목숨을 걸면서 차인표도 바빠졌다. 소통이 어려운 현지 배우들과 여러 번 리허설을 해야 했고, 콘티없이 한 장면을 여러 번 찍는 감독의 스타일 덕분에 수십번을 뛰고 굴러야 했다. “감독을 100% 보필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도 40도가 넘는 더위에서 수차례 뛰고 구르는 상황에서 약간의 짜증을 느끼곤 했단다. “그만 좀 찍자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목 끝까지 찼었죠. (웃음) 하지만 저는 그날 하루 촬영하면 숙소에서 쉴 수 있잖아요. 하지만 실제 탈북자분들은 자고 있을 때도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었을 듯싶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버텼죠.” 차인표는 촬영현장의 열악함보다는 시나리오의 몇몇 부분에서 감독에게 이의를 제기하곤 했다. 벌목장에서 벌어놓은 돈을 잃어버린 용수와 다른 탈북자들에게 탈북 브로커가 찾아온다. NGO에게 부탁을 받은 브로커는 NGO와 인터뷰만 해주면 돈을 준다고 말한다. 아내의 약을 구하고, 아들에게 축구공과 축구화를 사다주기로 한 용수는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독일대사관으로 진입한다. 대사관으로 들어와서야 용수는 깨닫는다. 돈만 받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구나. 이제 영락없이 남한으로 가야 하는구나. 이 부분에서 차인표는 용수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용수가 무뇌아도 아니고, 그 제안이 남한으로 가는 거라는 걸 왜 모를까 싶었어요. 이해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 생각에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야 여기서 교육을 받으니까 알지만, 그들은 어떻게 알겠어요.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이게 천국으로 가는 줄인지, 지옥으로 가는 줄인지 일단 내려오면 잡을 수밖에 없었겠죠.” 뜻하지 않은 탈북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크로싱>이 정치적인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목이다. 용수의 질주는 북한이 싫어서도 아니고, 남한이 좋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그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아내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김태균 감독 역시 “<크로싱>은 가족이 헤어지는 고통스러운 이야기이자, 가족이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탈북이란 소재를 담은 이상 <크로싱>은 정치적인 판단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이다. 제작진이 영화 촬영을 비밀에 부친 것도, 북한 체제에 관한 묘사를 최대한 아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차인표도 <크로싱>이 정치적으로 휘말릴까 싶어 우려하고 있다.

“지금도 발언을 조심하고 있죠. 그런데 용수는 친북이다, 반북이다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이 영화가 남한이 더 살기 좋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골탕먹이려고 만든 것도 아니었죠. 단지 용수는 무기력한 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남자가 가족을 찾기 위해 절박해지고, 강해지죠. <크로싱>의 영화적인 목적을 말한다면 그의 심정을 최대한 전달하는 게 아닐까요?”

김태균 감독은 <크로싱>을 통해 “매우 평범한 차인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평범한 차인표는 일반인 차인표가 아닌 자연인 차인표를 말할 것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차인표는 <크로싱>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하려는 마음보다는 이 영화가 탈북자 문제를 쟁점화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또한 영화가 무사히 제작됐다는 안도감이 더 크고 흥행은 둘째 문제다.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크로싱>을 선택했지만, 영화를 이끈 건 자연인 차인표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친다면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영화의 홍보를 위해 외치는 목소리로 들을지 모른다. 선행의 한 부분으로 비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선행이 유명인의 의례적인 가식일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많은 영화가, 그리고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작품에 담긴 진심을 이야기하지만, 진심이든 거짓이든 판단은 관객 몫이다. 그런데 차인표의 진심은 관객이 어떻게 판단하든 진짜 진심이다. 그러니 차인표의 선택을 이야기하면서 배우와 인간의 모습을 구분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 차인표의 선택은 배우 차인표의 선택이고, 그가 가진 수많은 모습과 직함의 선택이다. <크로싱>에 출연한 것이 선행의 하나로 비친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문제다. 관객이 그에게 인간 차인표만을 본다고 해도,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마흔두살 차인표의 ‘선택과 집중’이니까.

헤어&메이크업 재선, 지선(이경민 포레)·의상협찬 TIME·장소협찬 Cafe Maneu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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