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킬러의 고요한 일상에 깃든 불안 <아메리칸>
2010-12-29
글 : 장영엽 (편집장)

스웨덴의 설원을 산책하던 중년의 연인이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바위 밑으로 몸을 피한 남자는 능숙하게 총을 꺼내 괴한을 처치하고, 당황하는 연인의 뒤통수를 향해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직접 제작한 무기로 청부 살인을 저지르는 킬러 잭(조지 클루니)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다. 그러나 그는 은신처에서조차 안심할 수 없는 킬러의 삶에 지쳤고,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이탈리아의 한 시골마을로 잠적한 잭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임무를 기다리며 마을의 다양한 사람들- 늙은 신부, 자동차 정비공, 창녀- 과 알고 지내게 된다.

전문 암살요원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아메리칸>은 액션과 속도감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킬러의 고요한 일상에 깃든 불안을 조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거리에 살짝 드리운 그림자, 해맑게 웃으며 가방을 뒤적이는 연인을 보며 잭은 총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상의 사소한 움직임들이 목숨을 내놓고 사는 사람에게는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된다. 잭이 느끼는 불안은 느리고 고요하게 촬영된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조이 디비전과 이언 커티스를 다룬 데뷔작 <컨트롤>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상, 황금카메라상 등을 받은 안톤 코빈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의 불안을 진중하고 품위있게 그려낼 줄 안다. U2, 너바나 등의 뮤직비디오 제작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컨트롤> 또한 밴드와 관련된 영화였다는 걸 생각하면 <아메리칸>은 안톤 코빈의 본격적인 극영화 ‘데뷔작’으로서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이탈리아의 이국적인 풍광을 담은 수려한 영상 역시 인상적이다.

그러나 <아메리칸>은 <컨트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고 세련되나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부재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깊이있는 텍스트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전문 암살요원이 느끼는 불안감을 넘어서는, 삶과 죽음과 인간에 대한 풍부한 해석이 덧붙여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칸>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단선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다음 장면이 궁금하던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결말로 종료되고, 거기엔 살해 현장을 말끔히 수습한 암살요원의 뒷자리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미 촬영으로는 상당한 경지에 오른 감독에게 필요한 건 이야기 구성력이라는 점을 <아메리칸>은 일깨운다. 덧붙여 제목인 ‘아메리칸’은 영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다. 조지 클루니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탈리아인들은 “당신은 미국인(아메리칸)”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이탈리안 속의 아메리칸만큼 클루니의 존재감만큼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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