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내색을 않는 사람이다.” 장훈 감독이 <고지전>의 촬영현장에서 본 신하균에 대한 인상이다. 장훈 감독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힘들 때는 힘들다고 표시해도 되는데 (신하균) 선배님은 그런 게 전혀 없으시다. 그저 웃으신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단순히 신하균이 말수가 적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신하균이 <고지전>에서 맡은 강은표 캐릭터가 장훈 감독의 말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인민군과 내통하는 자를 색출하라는 상급의 명령으로 악어부대에 합류하게 된 강은표 중위에게 애록고지에 있는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그곳에서 인민군과 하루에 수차례씩 고지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전쟁에 익숙해진 악어부대는 이제껏 강은표가 보지 못했던 부대였고, 2년 전 헤어졌다가 악어부대에서 다시 만난 친구 김수혁(고수)은 순수함은 없어진 채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관객은 강은표의 눈과 귀를 빌려 악어부대에 얽힌 사연과 ‘진짜’ 전쟁을 보고 듣는다. 이야기를 관객에게 안내하는 관찰자인 만큼 장훈 감독은 강은표 역에 극의 균형을 노련하게 이끌고 갈 수 있는 배우를 필요로 한 건 당연하다. 그 배우가 “평소 신뢰감이 있고 편안한 연기로 점찍어둔” 신하균이다.
신하균이 처음부터 <고지전>을 매력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나 역시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과연 6·25 전쟁을 가지고 또 어떤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이미 6·25 전쟁과 남북관계를 다룬 작품을 두편이나 하지 않았던가.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는 초소에서 몰래 동료 오경필(송강호) 중사, 두명의 남한군과 함께 분단의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우정을 만들어간 ‘정우진’ 전사를 연기했고 <웰컴 투 동막골>(2005)에서는 6·25 전쟁 때 자군 병력에서 이탈해 우연히 동막골에 들어갔다가 역시 같은 이유로 모인 인민군, 연합군과 긴장감과 우정을 동시에 쌓은 국군 ‘표현철’을 맡은 바 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신하균은 “과거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발견”했고 이후 “장훈 감독에게 건네받은 한장의 사진을 보고 출연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당시 지형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여기저기 떨어진 폭탄 때문에 땅이 울퉁불퉁했는데, 그 풍경이 마치 상처가 난 우리의 얼굴 같더라. 그 안에 <고지전>이 보이더라. 그렇게 접근하는 과정이 흥분됐다.”
강은표는 극중에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연기 역시 리액션 위주여야 했다. “은표가 주로 하는 건 극중 처음 만난 악어부대원들에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리액션 감정이 과장되면 이야기가 자칫 신파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부족하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된다. 현장에서 다양한 리액션 숏을 찍어놓은 것도 편집할 때 감독님이 마음에 드는 감정을 붙이기 위함이다.”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끊임없이 분출하는 것이 배우의 욕망이자 본질이라는 점에서 강은표는 신하균에게 또 다른 숙제였을 것 같다.
그러나 신하균은 ‘강은표’라는 인물과 <고지전>이라는 작업에 거창한 수사를 붙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연기를 했다. 영화를 통해 많이 배우면서 살아가지만, 또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변화가 있긴 하겠지만 한편, 한 캐릭터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막연하게 좋았던 신인 때처럼 지금도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좋다. 내 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건 나중에 할 수 있는 거잖아. 물론 그런 생각은 한다. 나이가 드니까 체력이 달린다는 것 정도? (웃음)” 다음 선택이 정해질 때까지 안개 낀 애록고지를 바라보는 강은표의 눈빛은 한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