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컨대 <고지전> 시나리오에서 가장 탐나는 역할을 택하시오 한다면 악어중대 대위 신일영이 압도적으로 1위일 거다. 죽음의 처절함이 살갗으로 파고드는 전장. 고립된 고지에서 부대를 통솔하는 독기 어린 소년의 모습은 전쟁, 그 자체의 얼굴이다. 전쟁이라는 폭풍의 세기를 바로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처절한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단 하나도 쉬울 턱이 없다. 내적, 외적으로 배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어 발산해야 하는 과제, 그만큼 배우라는 직업적 의욕을 깨우는 도전이기도 했다. 이제훈에게 내려진 건 이 절체절명의 ‘명령’이었다. 장훈 감독은 기존의 얼굴 대신 신선함을 가지고 있되 능숙한 연기를 가진 배우를 물색했다. <친구사이?>에서의 현실적인 게이 ‘석이’, <파수꾼>의 강단있는 소년 ‘기태’. 두편의 독립영화에서 이미 그는 새로운 배우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세번의 오디션, 3개월의 기다림 만에 이제훈은 고지를 넘었다.
“내가 캐릭터의 아우라를 이겨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센 캐릭터, 어느 모로 보나 내겐 벅찬 역할이었다. 잘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도록 노력했다.” 매일매일 캐릭터를 쌓고, 다시 무너지고의 반복이었다. 비교대상도 어떤 레퍼런스도 없었다.“긴 촬영의 연속,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엄습해 왔다. 감독님의 말씀을 해답으로 믿고 갔다.” 고통을 잊으려 맞은 모르핀에 취한 광기, 그럼에도 전쟁의 공포를 벗고 싶은 어린 소년의 욕망. 절망과 혼돈을 넘어서 단단하게 뭉쳐진 매서운 눈빛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배우 이제훈의 창조물이다.
“너무 힘든데 하소연할 데가 없더라. 나중에 선배들이 ‘이런 현장 없다’고 하시기에 그제야 나도 좀 마음이 놓이더라. (웃음)” 버거웠던 신일영을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 그는 그 모든 걸 소중한 자산으로 쌓아둔다. “나 혼자 좋아서 하는 게 연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라는 것이 공동의 작업이라는 것, 함께해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걸 이번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그의 시작은 견고하고 바람직하다. 신일영이 폭발하는 순간, 어쩌면 함께 오열할 많은 관객을 향해, 배우 이제훈의 첫걸음을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