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공소시효 만료 그리고 살인 고백
2011-11-15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

“<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더니 투자자들이 웃더라.” 인터뷰 말미, 정병길 감독은 농담처럼 이 말을 불쑥 건넸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내고 내내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영화의 톤과 제작 규모는 차이가 있겠지만 정병길 감독의 ‘다크 나이트’ 발언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밑그림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다. 그동안 한국 범죄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두운 뒷골목을 거닐며 범죄자를 쫓는 흑기사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다르다. <다크 나이트>의 또 다른 주인공 조커처럼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은 자신의 살인을 만방에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 세상에 나타나 살인 참회록 <내가 살인범이다>를 출간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히지만 이두석의 완벽한 외모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듯한 태도에 현혹되는 사람들도 생긴다. 공소시효는 지났고, 살인범은 아름답다. 이 이야기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액션스릴러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는 2008년 스턴트맨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로 주목받았던 정병길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그는 차기작을 구상하던 도중 우연히 ‘카니발리즘의 대부’로 불리는 이세이 사가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세이 사가와는 프랑스 유학 도중 자신이 사랑하던 네덜란드 여성을 죽인 뒤 그녀의 고기를 먹은 사실이 밝혀져 큰 파장을 일으킨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저명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로비에 의해 별다른 구속 없이 석방됐다. 이후 이세이는 자신의 식인 경험을 기술한 책 <안개 속에서>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다양한 토크쇼에 출연하는 ‘명사 살인범’이 됐다. 이러한 이세이의 일화가 정병길 감독의 시선을 붙잡았다. “살인범이 자신의 살인을 고백하는 책을 썼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만약 이 살인범이 책을 출판한 뒤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좋은 일에 쓰고 회개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게다가 살인범의 외모가 꽃미남이라면 어떤 반응을 얻을까 궁금했다.” 이같은 그의 생각은 ‘쇼’에 열광하는 한국 언론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자극적이고 신선한 소재 찾기에 혈안인 언론이 살인범이 책을 냈다는 점, 그 살인범이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그냥 놔둘 리 없다. 그러한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지능적인 살인범과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처벌을 원하는 사건 담당 경찰 형구(정재영)와 희생자 유가족 대표 지수(김영애)의 행보는 <내가 살인범이다>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축이 될 예정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점이 중요하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시대적 배경은 2007년이다. <살인의 추억>의 밑바탕이 된 10차 화성연쇄살인사건, <그놈 목소리>의 배경이 된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의 공소시효가 2006년 1월, 3월, 4월 잇따라 만료되며 2007년 12월21일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 법률이 공포됐다. 하루 차이로 법은 바뀌었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 정병길 감독은 “예상치 못할 결말을 준비했다”는 말로 영화의 시사점에 대한 답변을 대신했다. 연쇄살인범과 공소시효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한 관객은, 내년 상반기 개봉예정인 <내가 살인범이다>를 보고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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