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에게 베를린을 무대로 남북한 요원들의 첩보액션을 그릴 <베를린 파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존 르 카레의 첩보소설들이 떠올랐다. 유럽에서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시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 온갖 인종의 난민들이 범람하는 독일 함부르크 기차역이 겹쳐졌고(<원티드 맨>), 독일에서의 첩보활동 중에 요원들을 전부 잃고 이중스파이 같은 잠입 명령을 수행하며 정부와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갈등하는 알렉 리머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어쨌건 북한이 남한보다 추울 테니 당연히 그들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존 르 카레는 세월이 흘러 고백하길,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작품 집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를 끝내자마자 <베를린 파일>에 착수했다. 100억원 예산으로 알려져 있는 <베를린 파일>은 베를린을 무대로 펼쳐질 남북한 요원들의 첩보액션물이다. 몇 개월 전 방송된 MBC 특별다큐 <타임>에서 <간첩>편을 연출하며 여러 탈북자와 간첩을 만났던 경험의 ‘톤 앤드 매너’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 과정이 자연스런 전초 작업이 됐다고 보면 된다. 물론 존 르 카레의 생생한 경험 못지않은 치밀한 조사와 준비가 바탕이 됐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는 공개할 수 없는 여러 인물과 사연들이 있었으며 자연스레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먼저 류승완 감독은 지금껏 공개된 정보들에 대한 정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뚜렷한 시놉시스가 공개되지 않은 <베를린 파일>이 ‘남한 조직에 침투한 북한 조직원이 북한에 버림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베를린 파일>은 그렇게 딱 한 사람만 쫓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밝혔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베를린 파일>에서 남한 정보부는 베를린을 중심 거점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는, 유럽의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는 북한의 로열 패밀리들의 계좌를 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남한쪽에서 그들을 압박해가는 가운데 베를린에 파견된 북한 공관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망명을 준비하는 이중간첩이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오면서 남북한 요원들이 베를린에서 대결을 벌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함께 배신당한 북한 비밀요원이 그 시스템으로부터 탈출하려 하고, 급기야 북한에서는 그들을 숙청하기 위해 또 다른 무시무시한 요원들을 보낸다.
얼핏 봐도 <부당거래>(2010)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뿐만 아니라 최정예 요원들의 거친 대결 양상들이 자연스레 그려지는 느낌이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취향과 색깔, 그리고 그로부터 기대되는 것들이 겹쳐져 이미 ‘그가 만들면 흥미롭고 재밌을 것’이라는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석규와 류승범이 캐스팅 명단에 오른 상태로, 남한쪽 수장으로 출연하게 될 한석규가 <이중간첩>(2002)에서 남한으로 위장 귀순한 대남 공작원 ‘림병호’를 연기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묘한 재미를 준다. 언제나 형 류승완과 절묘한 캐스팅 호흡을 과시해온 류승범이 변함없이 든든한 존재라면 최근 TV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이도 역으로 신선한 카리스마를 선보이고 있는 한석규는 관심의 초점이다.
<베를린 파일>은 허진호의 <위험한 관계>, 박정범의 <산다>, 양영희의 <조용한 방문자> 등과 함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공식 프로젝트 선정작 리스트에 올라 많은 관심을 모았으며, CJ E&M이 메인 투자로 나선다. 유럽 현지에서 100% 로케이션을 소화해야 하기에 스탭과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현지 프로덕션 서비스를 꼼꼼하게 검토, 물색 중이다. 무엇보다 그는 공간을 중요한 포인트로 생각하고 있다. 지난 10월 시체스국제영화제 참석차 유럽에 들렀을 때도 로케이션 헌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처럼 동유럽을 무대로 한 첩보액션물의 주요 이미지라 할 수 있는 번잡한 기차역이나 지하철역 등 관객이 자연스레 떠올릴 법한 공간들은 물론이며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바로 옆의 미국 대사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유대인 학살 추모비)이 굉장히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할 것”이라며 힌트를 준다.
본격적인 프로덕션 준비에 들어간 류승완 감독은 “원래 그냥 <베를린>으로 갈까 했는데 프로젝트 얘기를 들은 박찬욱 감독님이 제목이 썰렁하다고 뭐라도 하나 붙이라고 해서 <베를린 파일>이 됐다(웃음)”며 “남한의 요원이 북한의 비밀계좌를 찾아내고 그를 통해 남북한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개입되면서 사실감 넘치고 스피디한 한국형 첩보액션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정서적으로는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과 비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계절이 중요하여 ‘유럽의 음습한 추위가 영화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너무 춥지는 않은 ‘추위가 남아 있는 봄’쯤으로 내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크랭크인하는 게 목표다.
<베를린 파일>에 대한 오해
‘북한판 <본> 시리즈’ 아닙니다
“시리즈로 만들 생각은 없는데 말이죠. (웃음)” 류승완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에서부터 한석규와 류승범이 출연한다는 캐스팅 보도까지, <베를린 파일>은 세간의 관심이 몰리는 가운데 이미 똑같은 기사가 계속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류승완 감독은 거의 모든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북한판 <본> 시리즈’라는 수사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동유럽을 무대로 한 현대 스파이물’이라는 점에서 이미지가 손쉽게 겹치기도 하겠지만 <베를린 파일>에는 개인과 시스템의 충돌 이상으로 남북한의 냉전적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보도된 것처럼 북한 조직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남북한 스파이’ 양쪽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베를린 파일>은 ‘스파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선 굵은 중요 액션들 역시 ‘류승완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