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탐욕의 시대, 권력을 향해 쏴라
2011-11-15
글 : 강병진
사진 : 백종헌
김대승 감독의 <후궁: 제왕의 첩>

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의 이 단어는 조선시대 왕의 권력을 상징할 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속뜻을 품는다. 아마도 후궁은 왕의 무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이자 캐릭터일 것이다. 아내 외의 여자에 대한 왕의 욕정은 감출 필요가 없는 승은이다. 하지만 후궁에게도 왕의 간택이 은혜였을까? <혈의 누> <가을로> 등을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신작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뜻하지 않게 후궁이 되어 궁궐로 들어간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왕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후궁이 왕 외의 다른 남자에게 정을 품었으니, 그 사랑이 순탄할 리 없다. 무엇보다 이미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듯이, ‘궁’자체가 격렬한 운명의 공간이다.

조선이 배경이지만 <후궁>은 자막으로 명시할 법한 뚜렷한 시기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략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이 왕에게 권력의 지분을 요구하며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던 때가 <후궁>의 무대다. 비주류 무관의 딸로 태어난 신화연(조여정)은 어느 날, 후궁이 된다. 그녀의 부모는 모든 게 너의 인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부모의 권력욕이 딸을 궁으로 내몬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사랑해온 남자 권유(김민준)가 있다. 궁으로 들어온 화연은 왕위 즉위를 앞두고 있는 서원대군(김동욱)과의 관계, 그리고 권유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문제는 후궁인 그녀가 처한 상황이 단지 삼각관계의 꼭짓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궁은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후궁이 된 화연 역시 어느새 생존투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후궁>은 제작사 황기성 사단의 황기성 대표가 “은퇴 전에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며 제안한 프로젝트였다. 결과적으로 그 제안과는 다른 영화가 됐지만 김대승 감독은 그 속에서 “이야기나 장르와 상관없이 지금의 영화감독으로서 관객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길 법한 그릇”을 발견했다. “<혈의 누> 때부터 우리가 스스로를 지옥에서 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게 결국 탐욕이 아닌가란 화두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혈의 누>는 지금 보면 감독의 의도가 스토리를 압도해버린 느낌이 있다. <후궁>은 인물들의 탐욕이 얼마나 시의성을 갖느냐가 중요한 영화가 될 것 같다.” ‘탐욕’은 <후궁>을 역사 속의 이야기에 가둬두지 않을 주제다. 역사를 이어온 탐욕의 순환과 그에 따른 갈등은 지금 2011년의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풍경이다. “사실 조선은 왕이 실권을 가진 적이 별로 없는 시대다. 세종의 태평성대를 세조가 뒤엎은 뒤, 쿠데타에 가담했던 공신들은 특권층이 됐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 당쟁의 시초를 만든 것이다. 그런 역사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 않나. 누군가는 지금까지 정권이 딱 두번 바뀌었다고 하더라. 한번은 정조 때고, 또 한번이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김대승 감독이 세운 첫 번째 목표는 “선한 사람이 한명도 없는 궁을 만드는 것”이었다. “단 한명도 이타적이거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없다. 생각지도 않게 후궁이 된 여자가 벼랑 끝에 내몰려 자신도 탐욕을 좇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권력욕이 집결된 궁 자체를 지옥도의 느낌으로 묘사할 것이다.” 시나리오를 함께 쓴 <궁녀>의 김미정 감독도 <후궁>을 예감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다. <궁녀> 또한 왕의 여자들이 품은 금기된 욕망과 생존을 향한 욕구가 들끓는 이야기였다.

현재도 되풀이되는 탐욕의 역사와 함께 <후궁>을 단지 사극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또 다른 특징은 장르적인 서사다.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 <가을로> 등의 모든 전작에서 구축했던 플래시백을 활용한 시간의 운용과 미스터리는 <후궁>에서도 적용된다. 또한 이 영화에도 죽음과 관련된 중심 사건이 있으며 서로를 속이고, 속이는 걸 알면서 지켜보는 긴장이 있다. 김대승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방식에서 전작과는 다른 형태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단서를 보여주는 리듬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가 상상하는 이야기를 혼재시키는 느낌을 만들어보려 한다. <혈의 누>의 혈우(血雨)와 같은 판타지도 같은 맥락에서 쓰일 것이다. 죽음은 <후궁>에서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사건이다. 모든 백성들을 경쟁에 몰아놓고 낙오하면 죽는다고 가르치는 시스템 속의 죽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김대승 감독은 지금 그 무엇보다 후궁과 왕의 정사가 이 영화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크다. <후궁>에서 왕과 후궁의 관계는 영화가 말하는 권력의 속성을 정쟁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확장시키는 부분이다. 왕과 중전의 정사는 상궁과 내시, 의원들이 함께하는 공식 업무나 다름없지만 후궁과의 정사는 더 사적이고 은밀하며 그래서 더 강한 권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고, 지금처럼 생존문제에 내몰리는 시대가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하게 됐으면 한다. 단지 청와대나 여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살고 있는 삶 속에서 가져야 할 의문이다.” 금기된 사랑과 탐욕의 충돌 속에서 서스펜스를 구현할 <후궁>은 사실상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기보다는 지금의 관객에게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일 듯 보인다.

감독의 한마디

격(格)을 파(破)하다

“임권택 감독님과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나에게 학습된 게 있다. 내가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가 그분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나도 한때 그분의 영화처럼 정적이고 우아하고 격조있는 걸 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게 어린놈이 따라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 <후궁>은 세트와 의상, 음악 등 모든 면에서 내가 가지려 했던 격을 파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궁궐의 구조만 해도 우리가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근정전과는 다른 형태가 될 것이다. 근정전은 앞마당 전체를 함께 쓰기 때문에 가로 형태의 건물로 제작됐지만 <후궁>에서는 왕과 신하 사이의 거리를 멀게 보여줄 수 있는 세로 형태로 구현할 예정이다. 의상 또한 욕망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디자인하는 중이다. 스타일리시하면서 색감이 분명한 의상을 볼 수 있을 거다. 이런 게 미술감독과 의상감독의 영역이라면 감독인 나는 숏의 느낌도 전작과 달리 불안한 느낌을 안고 가는 쪽으로 연출하려 한다. 관습에서 벗어나자, 그래서 영화감독으로서 처음으로 내 것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게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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