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현장리스트 03. 건물이 3단계로 진화한다고?
2012-01-24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조석환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그림 같은 집’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아껴두는 말이다. 바다쪽으로 낸 유리창을 병풍삼아 쨍한 햇살과 구멍 송송 뚫린 현무암 바위, 넘실대는 파도가 기막힌 삼위일체를 이룬다.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듯 소박하게 키를 낮춘 목재 대문과 현관까지 이어지는 돌담길이 아기자기하니 귀엽다. 이곳은 <불신지옥>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건축학개론>의 주요 배경이 되는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의 촬영현장이다. “우리 영화 개봉하면, 제주도에 (부동산) 투기 붐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몰라.” 현장을 지키던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멋지다’, ‘아름답다’는 말을 연발하는 취재진에게 농을 건넨다. 하지만 이 말이 마냥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건축학개론>의 공간이 잘 지은 ‘세트’가 아니라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이기 때문이다.

왜 이 영화의 제작진은 세트가 아니라 집을 지어야 했을까.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건축학개론>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건축가 승민(엄태웅)에게 어느 날 15년 전 첫사랑 그녀, 서연(한가인)이 찾아온다. 서연은 무턱대고 승민에게 자신이 살 집을 지어달라고 하고 승민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건축주와 건축가로 다시 만난 그들은 친밀함과 이성적 호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들의 관계가 녹아든 서연의 건물도 시공 과정에서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잠깐, 건물이 변화한다고?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를 읽어본 제작자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누구나 멈칫했을 거다. 아무리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세상이라지만 같은 장소에서 1단계, 2단계, 3단계로 진화하는 건물을 영화에 담아내겠다고 마음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건축공학과 출신인 이용주 감독은 CG의 힘을 빌려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건축가가 건축주의 마음을 잘 알아야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듯, 연애도 시간을 두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호감이 사랑으로 바뀐다”는 것이 영화의 기본 컨셉인 만큼 땅을 구입하고 건축가를 고용해 제작진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진짜 집’을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촬영에 꼭 필요했다. 그래서 <건축학개론>의 제작진은 촬영에 앞서 눈 밝은 복부인마냥 제주도 ‘땅’을 보러 다녔다. “열 군데 정도 돌아보다가 가장 (풍경이) 예쁜 곳으로 결정”(심재명 대표)했다는 장소가 ‘제주도 올레길 5코스’의 위미리다. 1억7천만원에 구입했다는 150여평 부지와 구승회 건축가의 도움을 빌려 완성한 2층짜리 건물은, 촬영이 끝나면 손질을 거쳐 명필름의 시나리오 작업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객지 손님에겐 관심의 대상이고, 매일 보는 스탭들에겐 관리의 대상이다. 서연의 이층집은 1월5일 <건축학개론>의 현장 공개가 진행되는 내내 스탭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낮 촬영의 많은 시간을 집안 곳곳에 매달려 쓸고 닦고 광내는 데 할애하는 스탭들의 모습이 매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배우의 머리와 옷매무새를 어루만지는 스타일리스트의 그것과 영락없이 닮았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서연의 집은 가장 까탈스러운 ‘배우’다. 5일 현장에서 이 ‘배우’에 가장 애를 먹은 사람은 승민 역의 엄태웅이었다. 완공된 서연의 공간을 그녀에 대한 감정을 실어 어루만져야 하는 장면인데, 접히는 유리창(폴딩 윈도)이 때로는 너무 빨리 접혀서, 때로는 너무 안 접혀서 말썽이다. “지금 컷은 너무 스무드해. 새집답게 (창문 열 때) 뻑뻑한 느낌이 있어야지.” 꼼꼼한 성격의 이용주 감독은 쉽게 ‘오케이’를 내는 법이 없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갈매기들이 바다 위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쯤, 서연 역의 한가인이 빨간 화분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오며 승민을 부른다. “일찍 왔네?” 두 남녀가 함께 건물을 둘러보며 15년간 마음속에만 묻어뒀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나이트신 촬영을 기약한 채 이날의 현장공개는 막을 내렸다. 1월8일 촬영을 마친 <건축학개론>은 올해 3월 개봉예정이다.

15년 전, 건축과 학생이었던 승민이 서연의 낙서를 참고해 만든 2층집 모델. 어쩐지 서연의 새집과 닮았다.


완공된 집의 내부 모습.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직선 구조의 내벽과 문이 형식의 미를 살린다.


빨간 화분을 들고 완성된 집을 보기 위해 들어서는 서연(한가인).


서연 집의 전경. 제주도 건축 양식의 특성을 살려 현무암 바위로 돌담을 만들었다. 집의 디테일한 구조를 보여주는 촬영이었기에 스탭들은 촬영 내내 망치질하랴, 걸레질하랴 바빴다.


제주도에 없는 세 가지? ‘도적, 거지, 대문’이라고들 한다. 좁은 섬 안에서 두루 알고 지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대문을 높게 지을 필요가 없다고 제주 도민들은 믿는다. 그런 특성을 반영한 서연의 집 목재 대문.


살리느냐, 없애느냐. 구승회 건축가와 이용주 감독의 갈등을 부추겼던 문제의 기와 지붕. 직접 보니 안 없애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반성문을 쓰는 기분으로 시나리오를”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 배우 한가인·엄태웅 인터뷰

-캐릭터의 심리 상태가 공간에 밀접하게 반영되는 영화다. 캐릭터와 공간을 구상해나간 방식이 궁금하다.
=이용주_과거의 이야기를 먼저 구상한 다음, 이들이 15년 뒤에 어떻게 변해 있을지를 고민했고 그다음엔 집을 어떻게 설계할지 생각했다.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집이 있었다. 과거장면에선 다양한 공간을 거시적으로 보여주고 현재장면에선 한 공간에서 공사를 반복하는 모습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구승회 건축가에게 서연의 집을 의뢰했다. 영화의 연출자이자 건축주로 건물을 의뢰할 때 어떤 점을 강조했나.
=이용주_동성이지만 그 친구와 거의 연애를 했다. 또 엄청나게 싸웠고. 내가 요구했던 건 우리가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지어져 있던 원래 집의 기와 지붕을 그대로 살리자는 거였다. 건축가 입장에서는 왜 의뢰해놓고 손도 못 대게 하냐며 불만이 많았다. 그 과정이 고스란히 시나리오에 반영돼서 승민이 서연에게 하는 얘기가 됐고, 서연이 승민에게 요구하는 얘기가 됐다. 결과적으로는 건축가와의 다툼이 시나리오에 많은 도움이 된 셈이다.

-시나리오를 보면 승민, 서연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많이 다르다.
=엄태웅_그런 변화의 지점들이 재미있다. 예를 들면 과거의 승민이는 담배 한번 피우면 기절하는 사람이었는데 현재의 승민이는 담배를 굉장히 잘 피운다. 성격도 많이 뻔뻔해졌고. 그런 장치들이 재밌는 것 같다. 한가인_수지양이 연기하는 서연은 청순하고 맑고 깨끗한 친구인데, 내가 맡은 서연은 좀 다르게 표현이 된 듯하다. 승민이를 다시 만나기까지 이혼의 아픔도 겪고, 성격도 현실적으로 변했고. 내가 기존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줬던 캐릭터와는 달리 보이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엔 연기하며 ‘이렇게까지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감독님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더 좋아하시더라.

-<건축학개론>의 묘미 중 하나가 승민과 서연이 주고받는 대사다. 두 사람의 호흡은 잘 맞았나.
=이용주_태웅씨, 가인씨 모두 너무 바빠서 캐스팅도 늦게 됐고 촬영을 시작하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이 왜 이 영화를 오케이했는지 알겠더라. 배우들에게 승민, 서연의 모습이 많이 있었다. 특히 엄태웅씨 경우는 서연에게 미안해서 눈도 못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화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지 그 장면의 테이크를 열번 넘게 갔다. =엄태웅_담배를 피우는 장면이었는데, (테이크가 계속되다 보니) 두갑을 다 피웠다.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쓰러져 자다가 저녁에 깼다. 담배에 취했다. (좌중 폭소)

-왠지 영화의 내용이 감독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 같다.
=이용주_오해다. (웃음) 누굴 짝사랑한 적은 있었지만 나는 결국 연애를 했었다. 다만 태웅씨, 가인씨에게 많이 얘기했듯 반성문을 쓰는 기분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어린 시절의 무책임하고 찌질하고 비겁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창피하고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20대에 반성문을 써보내고 싶었다. 또 멜로도 멜로지만 이 영화의 또 다른 큰 축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편으론 반성을 하더라도 나이 먹어서 또 그 상황이 되면 달라지는 게 없더라. 나만 그런 것 같진 않고.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공간을 염두에 두고 연기해야 하는 장면이 많다.
=엄태웅_뭐랄까. 이게 단순한 공간이나 집이 아니라 약속이나 정리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연이에 대한. 오늘 촬영분도 공사를 마치고 집을 정리하는 장면이었는데, 정리를 하며 승민이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잖나. 공사가 끝났으니 서연이와의 관계도 정리해야 한다는 게 아쉬운 거지. 그런 점에서 집은 곧 서연이와의 연결고리다.

-1990년대 중?후반이 ‘과거’로 등장한다. 그리 오래된 시간이 아닌데 과거의 시점으로 비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용주_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그 시대를 뜨겁게 관통했기 때문에 90년대로 설정한 것 같다. 난 70년대를 잘 모른다. 80년대에는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90년대에 와서야 승민과 서연이 겪은 첫사랑도 해보고 좌절도 해봤다. 그런 경험을 90년대에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가져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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