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카메라 뒤에 돌아와 선 변영주 감독과 다시 만난 <화차>의 현장은 인파로 술렁이는 서울 용산역사. ‘재회’라는 단어의 고즈넉한 느낌과는 이보다 멀 수 없는 장소다. 도착해보니 손수레에 실린 카메라가 달리는 이선균을 놓칠세라 뒤쫓고 있다. 숨차게 따라 뛰던 변영주 감독이 기자에게 날린 첫인사는 “여기 서서 어쩌겠다는 거야? 다 찍혀!” 이례적으로 스테디캠까지 카메라 두대가 동원된 이날 현장에는 감독 의자가 따로 없다. 들고 다니며 확인하는 7인치 모니터가 전부다. 유동인구가 많은데다 보조출연자도 60여명이라 전 스탭의 신경이 곤두선 오늘, 그나마 평온해 보이는 인물은 강주석 동시녹음기사. 어차피 후시녹음이 불가피하니 헤드폰을 헐겁게 걸친 표정이 체념한 듯 편안하다.
199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원작 <화차>를 한국의 현재로 옮겨온 변영주 감독의 미스터리 <화차>의 드라마는,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 문호(이선균)와 시댁으로 향하던 선영(김민희)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행방불명된 사건에서 발화한다. 추리소설깨나 읽은 관객이라면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나 패트릭 쿠엔틴의 <추적자>를 떠올릴 터다. 선영의 행적을 캐기 시작한 문호는 그저 사고무친한 줄만 알았던 애인의 이력이 몽땅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몇해 전 개인파산을 했다는 기록보다 경악스러운 사실은 면책서류의 필적과 사진이 문호가 아는 선영의 것이 아니라는 점. 내가 사랑한 여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미칠 지경이 된 문호는 일자리를 잃은 전직 강력계 형사인 사촌형 종근(조성하)에게 도움을 청한다. 원작과 견주어 영화 <화차>의 큰 변화는 소설에서는 수사를 의뢰한 뒤 스토리 밖으로 물러서는 문호가 능동적인 해결의 주체로 나선다는 점이다.
취재진이 현장을 방문한 2011년 9월19일은 총 4회차의 용산역 신 촬영 중 셋쨋날. 문호가 역사를 가로지르는 숏에 오케이가 떨어지자 원형광장에서 멈춰선 문호가 초조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숏 촬영이 이어진다. 배우없이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며 문호의 시점숏부터 찍고, 이어서 이선균 주변을 카메라가 돈다. 하나의 무빙숏 뒤에는 수십명의 발버둥이 있는 법. 카메라 뒤를 꼬리잡기하듯 잰걸음으로 따르는 스탭의 행렬이 장관이다. 역과 협의된 촬영종료 시간은 오후 6시30분. 숨돌릴 틈 없이 선영과 종근의 신이 이어진다. 분홍 복고풍 원피스의 김민희가 대합실로 걸어 들어오자 그녀를 알아본 조성하가 다가가 팔을 나꿔채고 승강이 끝에 김민희가 달아난다. 멀리 높은 곳에 자리잡은 김동영 촬영감독의 카메라가 부감으로 전경을 담고 화각 밖에서 스테디캠이 배우들의 옆모습을 좇는다. 사흘째 용산역 일대를 맨발로 누비고 있는 김민희는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 절룩거리고, 전력질주 연기가 일주일에 접어든 조성하의 눈에 서린 핏발은 분장이 아니다. 벗겨져 나뒹구는 앞코가 닳아빠진 빨간 구두가 선영의 사연처럼, 부서진 꿈처럼 처연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순애보>에서도 김민희는 루비슈즈를 신었더랬다. 행인들의 발에 채이다 짓밟히는 선영의 구두. 구두를 밟는 무심한 발 연기는 변영주 감독이 직접 한다. 그러고도 촬영분은 세컷이나 남았다. 보조출연자들을 향해 변 감독이 우렁차게 지시한다. “자, 들어갑니다. 각자 기분 좋게 걸을지 바삐 걸을지 정하세요.” 다부지지만 짜증기 없는 목소리. 그녀는 확실히 즐기고 있었다. CJ E&M 산하 필라멘트픽쳐스의 두 번째 제작작품 <화차>는 오는 3월 스크린에 오른다.
눈에 익은 선영의 구두를 발견하고 멈칫하는 문호의 숏. 렌즈를 32mm에서 50mm로 타이트하게 바꿨다.
초췌해진 종근이 선영을 발견하고 따라붙는다.
“지나가주세요. 지나가주세요.” 행인이 많은 기차역이 현장이라 스탭들 입에 종일 붙어 있던 애절한 한마디다. “오늘 꿈에도 들릴 것 같아”라고 누군가 푸념한다.
연인을 찾아 헤매는 문호와 그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부와 녹음팀도 줄지어 360도 달리기를 반복했다.
<화차>에서 김민희는 인물이 처한 조건에 따라 몇벌 안되는 옷을 돌려입는다. “늘어진 추리닝도 제 옷처럼 척척 붙더라”는 변영주 감독의 자랑 섞인 코멘트.
“우리 모두의 중압감이 깔려 있는 이야기”
변영주 감독과 배우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에게 듣다
-장편극영화 두편을 통해 얻은 경험적 지혜 중 <화차>에 임하면서 마음에 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변영주_아다치 미쓰루의 만화 <H2>에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의 발화점을 여기까지라고 정해놓기 때문에 자기를 다 태우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공감한다. 상업영화는 감독이 원하는 한 가지를 성취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술 깨려고 심야상영에 들어온 관객조차 뭔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 원치 않는 걸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가 열이면 열을 다 해야지 그중 둘을 해내는 걸로 자족하면 안된다는 말이다.-시나리오 10고를 거치며 <화차>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뭔가.
=변영주_20고다. 정작 가장 큰 변화는 배우를 만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만든 촬영고에서 나왔다. 문호는 이선균씨를 만나 나약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현실적이고 강단있는 남자로 변했고, 종근은 침잠한 인물에서, 콤플렉스와 욱하는 성격이 있는 현실적 40대가 됐다. 무엇보다 선영은 김민희씨로 인해 분량이 늘었다. 모 배우가 새벽 2시에 전화해 이런저런 의논을 할 때 무척 즐거웠는데….
이선균_2시라니! 밤 11시다. (웃음) 애들 재우고 시나리오 보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였다. 문호는 조사를 의뢰하고 빠지는 원작과 달리 종근과 같이 추적에 나서게 되므로 소심하고 나약해서는 개입할 수 없었다. 대본과 실제 연기 느낌은 또 다르다.-선영은 보이는 것보다 관객이 상상해야 할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단편적 회상, 부서진 이미지들로 어떻게 하면 인물을 강렬히 그릴지 고민도 있었을 텐데.
=김민희_거꾸로 매 장면 감정이 깊고 연기적으로 보여줄 게 많은 캐릭터라 배우로서 굉장히 욕심났다. 문제의 연속성은 감독님이 연출로 쌓고 이어주셔야 할 부분이다.
변영주_선영은 장면마다 모습이 다르다. 무기력한 과거가 있고, 남의 삶을 훔치려고 우체통을 뒤지는 모습이 있다. 그걸 잇는 다리는 문호와 종근이 선영을 추적하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거다.
이선균_민희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감독님께 진짜냐고 되물었다. 분량 면에서 선뜻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을 거다. 그러나 영화 전체에 드리우는 임팩트는 남자 둘보다 훨씬 강할 거다. 제천 촬영에서 멍들고 산발한 분장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다 찍고도 민희가 그 모습대로 밥을 먹고 있더라. 진심으로 캐릭터를 즐기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화차>는 선영이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아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변영주_<화차>가 실패로 가는 첫 지름길이 있다면 만드는 우리가 그녀를 먼저 안쓰러워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관객이 ‘쟤도 참 안됐구나’ 생각하고 동시에 ‘그래도 그렇지’ 하면서 그녀로 인한 희생자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화차>는 90년대 초 일본 거품경제기가 배경이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으로 읽어도 특별한 이질감이 없다. 동시대 한국사회와 어떤 접점이 있다고 보나.
조성하_내가 실제로 부채 때문에 벼랑에 몰린 경험이 있고, 요즘 학자금융자로 공부한 요즘 젊은이들이 채무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모습을 흔히 본다. 어떻게든 이 사회에 자기 자리를 찾아 발붙이고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의 중압감이 깔려 있는 이야기다.
김민희_살아가면서 힘든 궁지에 내몰렸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하는 모습도 현실과 비슷하다.
이선균_솔직히 처음에는 IMF 때 이야기가 아닌가, 조금 늦지 않았나 했다. 그러나 인생을 통째로 바꾸고 싶은 인간의 영원한 욕구이기도 하니까. 한편 주위를 둘러보면 외환위기 때에 비해 사정이 나아진 듯해도 안쪽을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상도 받는다.
변영주_“아무개처럼 살고 싶어”라는, 타인의 삶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집중했다.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아무도 찾지 않는 세태의 무서움도. <화차>의 공포는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