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얼음저장고’ 소재의 영화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양수리 <취화선> 오픈 세트장.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딴판이다. “오늘은 봄이네요 봄” 하고 스탭들이 인사를 건넨다. 요 며칠 촬영 중 유독 따뜻하단 말이지만, 웬걸, 영하를 웃도는 현장날씨가 매섭기만 하다. 애석하게도 영화 속 시간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여기저기 민소매에 짚신을 신은 보조출연자들이 추위에 언 살을 비비는 동안, “입김을 단속하라!”는 절대명령이 퍼진다. 촬영에 등장할 당나귀 한 마리가 스탠바이. 곧이어 한복 차림에 머리를 틀어올린 차태현이 등장한다. 사극이 처음인 만큼 차림새는 사뭇 생소하지만 그의 코믹함이 조선시대라고 통하지 않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분량 역시 차태현과 이문식의 코믹액션 배틀이다. 금서를 뺏기지 않으려는 이문식을 벌렁 드러눕혀 바지까지 홀랑 벗겨내 서책을 뺏어가는 막무가내의 민첩함. 속곳만 입은 채 “내 바지!”를 외치는 이문식이 비실비실 뒤따르면, 감독의 컷 소리가 떨어진다. 한바탕 몸개그에 현장에 웃음소리가 왁자하다.
덕무(차태현)와 양씨(이문식)가 벌이는 오늘의 코믹 설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서역에서 온 금서를 두고 벌이는 승강이쯤은 영화의 무궁무진한 볼거리에 비하자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영화에는 조선시대 금보다 귀한 얼음을 저장했던 서빙고라는 소재 자체의 특이함과 이권을 독차지한 세력으로부터 얼음을 훔쳐내려는 흥미진진한 사건이 유기적으로 개입한다. 덕무를 중심으로 모인 11명의 도둑군단은 이른바 각 분야 최고의 꾼들. <오션스 일레븐>을 능가할 캐릭터의 향연까지 넘쳐난다. 차태현, 이문식을 비롯해 민효린, 오늘 촬영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지호, 이채영, 성동일, 고창석 등 개성 강한 조연배우들까지 모두 영화 속 주요 인물로 각자의 활약을 펼친다.
지난해 10월 크랭크인한 영화는 이제 약 70%의 촬영을 마친 상태. 전반이 대사와 상황 중심의 촬영이었다면 남은 후반은 서빙고를 털기 위해 얼음판과 수로에서 펼쳐지는 볼거리 중심의 액션신이다. 짧아진 겨울 해를 감안할 때 얼음과의 사투를 벌이려면 촬영을 서두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인물도 사건도 많은 바쁜 촬영장에서 짬을 내 인터뷰를 마친 김주호 감독이 바람과 함께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민효린(가운데)은 극중 11명의 서빙고 털이단 일원인 수련을 연기한다. 잠수복 차림으로 자유자재로 물에 입수, 덕무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섹시한 행동요원. 거친 액션신이 워낙 많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오늘 장면만은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게 민효린의 소망.
한층 수척해진 얼굴에 다부진 표정의 차태현. 첫 사극인 만큼 현장에서 임하는 각오도 대단하다. 극중 리더인 덕무처럼 현장의 차태현은 후배 배우와 스탭을 챙기는 걸로 평판이 자자하다.
한국형 <오션스 일레븐>기대하시길
김주호 감독 인터뷰
더 화려하게 더 유쾌하게 더 재미있게! 라는 생각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착수했다는 김주호 감독. 11명의 인물 하나하나의 차별화된 매력과 배우들의 앙상블이 첫 연출에 큰 지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의뢰인>의 각색 작업 등을 마치고 데뷔하는 김주호 감독을 만났다.-얼음을 훔치는 11명의 도둑 이야기. 조선시대판 <오션스> 시리즈가 떠오른다.
=한국형 <오션스> 시리즈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런데 <오션스> 시리즈에서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외의 인물들은 기능적 역할만 하지 않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인물들은 하나하나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오션스> 시리즈와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 같다.-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만큼, 주요 배역을 다 살리다보면 이야기의 중심이 흐트러질 우려도 있다.
=그 부분이 고민이었다. 해결책은 기본 스토리 구조의 강화였다. 인물들이 그 틀에 기여하지 못하면 매정하지만 끌어냈다.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마지막 컷에 차태현이나 오지호 같은 주요 배역으로 포인트를 주는 장치를 해서 산만함을 배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차태현식의 코믹 연기가 고스란히 ‘덕무’ 캐릭터에 연결되어 있다.
=차태현씨가 이전에 하던 코믹 연기의 방식은 황당한 상황에 대한 리액션이 주를 이루었다. 이번 작품에선 기존의 리액션 코미디도 보이지만 여기에 스스로 만들어내는 코미디가 더해진다. 70~80년대 방식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대사로 표현하는 코미디같이 방법도 다양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차태현식 코미디를 발견할 거다.-볼거리 면에서 서빙고의 재연이 기대된다.
=기록만 있지 실증자료나 도면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얼음저장고는 북한의 석빙고, 안동의 동빙고 등 몇개가 전부다. 영화 속 서빙고는 그걸 토대로 상상에 기대어 유추해낸 모습이다. 세트를 짓고 상당 부분 CG 작업도 해야 한다. 빙고 자체의 스케일보다는 그걸 털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액션신의 재연에서 버라이어티함을 살리려고 한다.-다양한 사극이 제작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의 차별점을 찾는다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수평적이고 병렬적이다. 이런 전개 방식은 직선으로 초점을 두고 상황이 전개되는 기존 사극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다양한 몽타주 장면들과 함께 스피디하고 화려한 볼거리들이 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