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⑨ - '생각지도 못한 일'이 필요해
2012-02-21
글 : 송경원
전쟁영화는 이제 시효를 다했다
<쉬리>는 ‘우리 영화’만의 독자적 정서를 제공하면서 참신한 볼거리를 충족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아니 전쟁영화에는 돈이 든다. 상업장르영화로서 전쟁영화는 그리 매력적인 선택이라 할 수 없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거대한 제작비에 비해 소구 관객층이 그리 폭넓지 않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더구나 장르적으로는 마니악한 편에 가까우며 소재의 한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영화시장에서만은 전쟁영화, 혹은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넘쳐난다. 그저 분단이라는 드라마틱한 설정과 고유한 지역 정서에 기대려는 전략일 수도 있고, 언뜻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이자 성공의 포문을 열었던 영화들에 대한 향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나 그것만으론 수많은 실패작들의 시체 위에서 계속 반복되는 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고지전>의 상대적 부진과 <마이웨이>라는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적인 행군은 아마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한국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스펙터클한 무대 위에 멜로나 휴먼드라마를 결합한 퇴행적 낭만의 세계다. 1990년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그중에서도 전쟁영화)가 추구해온 방향은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서사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보편적 스펙터클의 재현이었고, 여러 영화적 장치를 우회하여 안정적인 장르 관습 위에 안착했다. 이전 한국전쟁영화와는 달리 90년대 말부터 등장한 영화들은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을 전면화했으며 이것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념적 정체성에서 해방된 관객은 역사 앞에 방치된 개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정을 보냈고, 그 결과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소년적 순수함이란 이름의 낙원(또는 신기루)에 도달한다. 한국전쟁영화는 그 낭만적 꿈속에 머물러왔다.

그리고 그 꿈은 매우 정교한 재현 위에서 피어난다. 비약적인 표현의 발전이야말로 전쟁영화 흥행의 본령이자 출발이다. 한국영화에서 전쟁과 분단은 역사인 동시에 역사 밖에 속해 있다. 애초에 역사적 사실을 온당하게 재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남북한이 여전히 대치 중이라는 특수성은 영화적 허구에 불과한 재현에 진실성을 부여하여 관객과 밀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재현방식의 디테일과는 다른 ‘사실감’이 단지 소재만으로도 확보되는 것이다. 이는 장르영화 제작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다. <쉬리>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그 자체로 참신한 볼거리를 충족시켰고, 이같은 스펙터클은 강력한 지역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우리 영화’만의 독자적 정서를 제공해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이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마이웨이> 같은 대작이 왜 참패할 수밖에 없는가. 호평이었던 <고지전>은 왜 흥행하지 못했는가.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한국전쟁영화’는 근 10년간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성장해왔다. 거대하고,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영화는 애초에 반전과 평화를 전제로 하기에 감동의 패턴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영화’는 영웅이 등장하는 일반적인 전쟁영화와 달리 형제애를 기반으로 하나된 민족을 갈망하는 고유의 정체성을 선보여왔지만 이젠 그마저 진부한 것이 되었다. 영화적 완성도가 더해가는 만큼 반대로 한국전쟁영화라는 ‘장르’로서의 에너지는 고갈되어가는 것이다. 요컨대 더이상 아무도 <마이웨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전쟁’만큼 유행을 타지 않는 소재도 없다. 그러나 장르 공식에 안주하는 순간 관객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들에겐 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필요하다.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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