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오스카 시상식에 쓰일 음악을 계획하면서 한스 짐머는 다인종과 다장르의 융합을 상상했다. 이를 위해 모인 인물은 힙합의 패럴 윌리엄스, 클래식 기반의 한스 짐머 자신, 그리고 아시아를 대표할 A. R. 라흐만이었다. 라흐만의 오스카 무대는 이번으로 세 번째가 되었다.
라흐만의 일대 전환점은 2008년작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찾아왔다.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동시에 휩쓸며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마지막에 삽입된 <Jai Ho>는 푸시캣 돌스가 부른 영어 버전이 빌보드 싱글 차트 15위에 오르기도 했다. 서구 클래식 기반의 거장들이 단단히 버티고 있는 영화계에서 인도색을 가득 머금은 라흐만의 음악은 이국적인 자극제가 되고 있다. 할리우드는 시나리오, 배우, 음악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으며 라흐만의 신비로운 동양적 색채는 그 수요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라흐만은 이미 인도에선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곡가다. 세계적인 감독 마니 라트남의 주요작들과 상승세를 같이해, 타밀영화 하면 라흐만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1992년 <로자>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 숱한 작품들을 함께하며 인도영화의 새 장을 열어젖혔다. 특히 라흐만의 음악은 계급 갈등이 첨예한 인도에서 맨 밑바닥의 한과 상류층의 우아함을 모두 아우른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음악의 보편성은 미국에까지 전해져 <타임>에 “첸나이의 모차르트”라는 평도 실렸다.
라흐만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고, 아버 지는 인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였다. 늘 주변에 음악이 있던 덕분에 라흐만은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9살부터 작곡을 했다. 그의 인생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2년이었다. TV 광고, 다큐멘터리 음악을 하고 있던 라흐만에게 감독 라트남이 <로자>의 음악을 부탁한 것이다. 라흐만이 만든 몇개의 샘플에 라트남은 크게 만족했고, 영화가 개봉했을 땐 엄청난 사운드트랙 판매고와 호평으로 이어졌다. 라흐만은 이 영화로 데뷔 신인으론 최초로 인도 내셔널필름어워드에서 ‘최우수 음악감독상’을 수상한다. 라흐만이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대니 보일을 만난 건 영국에서였다. 인도 출신 감독 세자르 카푸르가 연출한 영화 <골든 에이지>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국에까지 진출한 그를 보일이 눈여겨본 것이다. <Jai Ho>가 성공한 이후 라흐만은 인도의 영화음악가들이 가장 동경하는 전설이 되었다.
라흐만의 음악은 동양적 색깔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성이 특징이다. 인도의 전통음악에 능한 것에 더해 서양 클래식 전공자에다 어려서부터 신시사이저에 관심이 많았던 덕이다. 대표작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런 음악 폭들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인도의 화려한 오리엔탈 선율과 리듬이 테크노와 한데 뒤섞인다. 2010년작 <127시간>에서도 라흐만의 음악은 빌 위더스의 펑키한 크루닝에서 다이도의 순백한 서정성까지 아우른다. <127시간>은 다시 한번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그를 안정적으로 세계 무대에 안착시켰다. 현재 라흐만이 준비 중인 차기작은 인도 뭄바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뮤지컬 애니메이션 <몽키스 오브 뭄바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중에서 <Jai Ho>
타밀 시절의 명곡들을 빼놓을 수 없지만 단 하나의 트랙을 꼽는다면 <Jai Ho>다. ‘그대에게 승리가 있으라’는 뜻을 가진 이 노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현란한 마지막 댄스장면에 흐른다. 여러 대의 타악기들이 겹치는 역동적인 리듬, 인도풍의 화려한 오리엔탈 선율과 스트링 추임새가 포인트다. 1분을 남기고 흐르는 클래시컬 스코어 후주에선 동서양에 모두 능한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