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나는” 영화.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최종병기 활>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최종병기 활>의 음악은 소중한 여인을 되찾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두 남자의 심장박동소리와 맥을 함께한다. 이 작품으로 음악감독 김태성은 2012년 충무로 영화관계자들이 가장 자주 찾는 이름이 됐다. 올해 그가 이름을 올릴 작품만 해도 <코리아> <타워> <점쟁이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네편 이상이다. 하지만 김태성 음악감독은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 아니다. 예고편 음악 작업으로 시작해 스물다섯살 당시 <안녕! 유에프오>로 최연소 음악감독으로 입봉했으며, 김종관 감독과 20여편 작업을 거쳐 지금에 이른 그는 준비된 유망주였다.
-<코리아> <타워> <점쟁이들> 등 올해 기대작들의 음악을 줄줄이 맡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코리아> <점쟁이들> <타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정도다. 원래 스케줄은 <최종병기 활> 다음에 <코리아>였는데, 그 사이에 <퍼펙트 게임>처럼 치고 들어온 영화들이 많다.
-다른 음악감독들과 달리 팀이 아니라 혼자 작업하는데, 작업량을 감당할 수 있나.
=나도 이렇게 많은 작품을 맡은 건 처음이다. 하나의 테스트라 생각하고 있다. 주변에서도 지금이 중요하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하라고들 말해준다. 대신 작곡은 내가 하고 외부 아티스트들의 도움을 받아 음악에 변화를 주려 한다. <코리아>의 경우 짙은, 센티멘털 시너리, 기타리스트 박지열, 첼로 성지송 등 평소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참여시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점쟁이들>에는 창작 타악 그룹 공명이 함께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음악 작업 의뢰가 많아졌나.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최종병기 활>부터인가.
=그런 것 같다. 10년 동안 영화음악 일을 해왔지만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작품을 함께한 김종관 감독님 마니아들 정도? (웃음) 결과적으론 <최종병기 활>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시는 것 같다. 한국 영화음악 시장이 참 웃긴 게 성공을 하면 일이 몰리는 구조다. 정말 공들여 녹음했던 작품도 흥행이 잘 안되면 묻히고. 결국엔 작품을 잘 만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공들였는데 잘 안돼서 아쉬웠던 작품이 있었나보다.
=있다. <가루지기>(2008)라는 영화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이 영화 이전까진 영화음악은 음악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가루지기>를 하면서 음악보다 장르에 충실한 게 (영화음악의) 기본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어떤 일이 있었나.
=<가루지기>는 불가리아에서 엔니오 모리코네 스탭들과 같이 작업한 영화다. 120인조 오케스트라도 썼다. 음악을 들어보면 코미디영화의 음악답지 않게 서정적이다. 감독님과 내가 의기투합해서 섹시코미디는 족보 있는 장르다, 이런 영화 무시하는 풍토를 없애보자며 후반작업 시간도 부족했는데 해외까지 나가 욕심을 부린 거다. 그래서 최종 점검도 제대로 못한 채 개봉해야 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의 음악적인 욕심을 덜어내고 보다 작품에, 장르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종병기 활>을 작업하면서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음악을 만들었다.
-<가루지기> <크로싱>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최종병기 활>은 작정하고 음악으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느낌이 있더라.
=맞다. (웃음) <최종병기 활> 이전엔 내 음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멜로 음악, 정적인 음악으로 대변되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사실 장편영화 작업을 하기 전 예고편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때 공포부터 코미디까지 별별 장르의 음악을 다 만들었었다. 그러니 액션영화의 음악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회가 와서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만든 게 <최종병기 활>이었다. 처음부터 정신없이 음악을 몰아붙이는 게 이 작품의 컨셉이었다.
-<최종병기 활>에서 좋았던 점은 음악이 마치 음향효과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퍼커션은 전장의 북소리 같고, 피리 소리는 전투를 알리는 신호 같다. 마치 음악이 영화의 사운드를 대변하는 느낌이랄까.
=액션영화의 장점이 그런 독특한 질감의 소리들을 써도 된다는 거다. <최종병기 활>을 보며 관객이 ‘효과음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소리들이 사실 음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처럼 음악이 영화의 음향효과처럼 앰비언스로 들어가는 추세가 현재 전세계 영화음악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음악의 질감이나 작법이 이전 세대의 방식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전 세대와 지금의 세대는 어떻게 다른 것 같나.
=엔니오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엔 좋은 테마음악이 우선시됐다. 지금은 영화음악이 영화의 호흡, 긴장, 리듬을 조절하고 신을 묶어주는 기능을 하는지, 시나리오에 완전히 녹아드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최근에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나. 예전보다 기억에 남는 영화음악이 별로 없다고. 마이클 다나의 <머니볼>이나 루도빅 바우스의 <아티스트>, 마이클 지아키노의 작품들을 보면 테마가 명확하지 않다. 이 사람들은 전체의 시퀀스를 묶고 리듬을 나누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따로 놓고 보아도 좋은 음악보다는 영화를 뒷받침하는 음악을 선호하는 시대가 온 거다. 내가 보기엔 관객도 영화에서 멜로디가 자주 들려오면 음악 과잉이라는 평가를 하는 것 같다. 사실 작곡가로선 아쉬운 점이 많다. 영화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역사에 남는 멜로디, 회자되는 멜로디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잖나.
-어떻게 보면 이런 변화가 O.S.T 산업의 쇠퇴와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개봉한 영화의 O.S.T를 음반판매점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
=O.S.T 시장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은 O.S.T를 발매해도 음악감독의 개인 작품집 같은 느낌이다. 예전에 음반산업이 활황일 때도 O.S.T가 성공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었다. <접속>이나 <봄날은 간다> 정도가 성공했지 엄밀히 말하면 결코 크지 않은 시장이었다. 지금은 극소수의 마니아들만 O.S.T를 찾아 듣는 것 같다. 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부담이 있다. O.S.T를 내는 데 적게는 400만~500만, 많게는 1천만원 가까운 돈이 드는데 그 돈을 모두 저작권자가 부담해야 한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얻을 수 있는 수익도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이 한곡을 듣는다고 하면 저작권자에게 떨어지는 돈은 1원 정도다. 1만명이 들어도 수익이 1만원인 거지. 그리고 10년 전 영화음악 제작비와 현재 제작비가 거의 동결이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O.S.T를 낼 수가 없는 거다. 나도 1년에 네 작품 정도를 하면 그중 한두편 정도만 고생했던 연주자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O.S.T를 낸다.
-지금 한국영화 음악계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첫 번째 부족한 작업시간이다. <최종병기 활>은 2주, <퍼펙트 게임>은 10일의 시간밖에 없었다. 개봉 스케줄을 못박아놓고 거기에 편집 기간을 맞추다 보니 음악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음악하는 사람들이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게 적어도 6주에서 8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제작비에 대한 고려도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개런티부터 모든 제작비를 통으로 받는다. 거기엔 연주자들의 섭외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좋은 연주자들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10년 동안 영화음악 일을 해왔지만 지금도 통장 잔고를 보며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외국은 선곡비부터 연주자비까지 모든 게 따로 책정되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대우는 해줘야 하지 않나.
-영화음악계 내부의 문제점은 없나. 항간에선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선배들 때문에 신인들이 치고 올라갈 자리가 없다는 얘기도 있다.
=내가 느끼기에 그건 핑계다. 사실 굉장히 많은 신인 작곡가들이 음악으로 데뷔했었다. 지난해도 그렇고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꾸준하게 활동하지 못하는 건 그들이 적극적이지 못한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쉰 적이 없다. 지금도 필름메이커스 사이트에 접속하면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10년 전부터 ‘단편영화음악 무료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꾸준히 같이 작업할 파트너를 찾아다녔다. 영화제도 돌아다니면서 감독님을 직접 찾아다닌 적도 있다. 내가 예고편 음악을 만들게 된 것도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영화사에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때인데, 그때부터 뭔가 끊임없이 활동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윗 선배들이 잡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1년에 제작되는 영화가 100편이 넘는데 그중에서 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건 많아봤자 네편이다. 그외의 작품들은 충분히 신인들에게 기회가 있다.
-장편영화 작업을 하면서도 김종관 감독의 작품들,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 이수진 감독의 <적의 사과> 등 꾸준히 독립영화 작업을 병행해온 이유가 있나.
=<가루지기> 이후 영화 작업을 할 때 훨씬 더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게 됐다. 상업영화는 포커스가 감독보다 대중에 맞춰져 있다. 관객이 감정이입하는 대상에 맞춰 음악을 설계한다. 이처럼 관객 취향에 맞춰 음악 작업을 하다보니 음악적인 고민을 배출할 창구가 필요했다. 독립영화의 경우 감독과 바로 의사소통할 수 있고 개봉 스케줄도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음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다. 음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선 훨씬 더 재미있는 시도들을 해볼 수 있는 거다.
-작곡을 전공했는데, 영화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렸을 때부터 꿈이 뚜렷했다. 영화음악을 하려고 경희대학교 작곡과에 간 거였다. 어린 시절 <시네마천국>과 <미션>을 보면서 영화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런데 아는 분은 알겠지만 작곡과에 가면 현대음악을 배우잖나. 영화음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들으면 관객이 다 자는 음악(웃음)을 배우고 있자니 빨리 현장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대학 1학년을 졸업하고 군대를 가려다 운좋게 ‘태권브이 부활 프로젝트’의 음악을 맡게 됐고 그 인연으로 예고편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예고편 음악을 만들게 됐다. <챔피언> <연애소설> <라이터를 켜라> 등의 예고편 음악을 2년 동안 만들었다.
-<안녕! 유에프오>(2003)로 음악감독 입봉을 했다. 그 뒤로 꾸준히 혼자서 작업해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뭔가.
=보통 음악감독을 꿈꾸는 분들이 다른 음악감독의 어시스턴트 생활부터 시작한다. 길게는 5, 6년, 짧게는 2, 3년 정도 어시스턴트로 작업하다가 독립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지켜보니 어시스턴트로 활동하면 자신의 작업을 하는 데 손해를 많이 보더라. 아무래도 윗사람에게 맞추게 되고, 때로는 어시스턴트의 음악을 자기가 만든 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재능있는 친구들이 상처를 받고 이 바닥을 많이 떠나는 걸 보아왔기에 어시스턴트 생활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예고편 음악 작업을 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챔피언> <연애소설> 같은 경우 예고편 음악이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아무도 내가 만든 줄을 몰랐다. 관객이 본편 음악감독에게 “예고편 음악 너무 좋아요”라고 남긴 댓글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혼자 작업하면 힘든 점은 없나.
=처음부터 혼자 맨땅에 삽질하듯이 영화음악을 시작해 가끔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 음악감독들이 쓰는 큐시트가 있는데, 나는 그 큐시트의 개념도 몰랐다니까. 심지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해서 지지난해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아카데미에 가서 학생으로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현직 음악감독님들이 와서 강의를 하는데, 내가 가장 열심히 질문하는 학생이었다. (좌중 폭소) 감독과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는지, 녹음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영화계 네트워크가 없는데도 작업 의뢰가 들어왔던 건가.
=신기한 게 대중은 나를 잘 모르지만 음악감독님들이 나를 좋아해줬다. <체포왕>은 <화차> <돈의 맛>의 김홍집 음악감독님이 나를 추천해주셨고, <퍼펙트 게임>의 경우 김준성 음악감독님이 제작진에 “내가 이 일 못하면 김태성에게 가라”고 했단다. <최종병기 활>도 음악공부하는 친구들이 나를 다세포클럽 장원석 대표에게 추천했다고 하더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꾸준히 작업하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는 거다. 10년 전부터 같은 자리에서 조용하게 음악을 만들어왔기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생기는 것 같다. 한 작품이 안됐다고 조바심을 내고 일희일비하면 안된다는 거다.
-앞으로 음악감독으로서 어떤 시도를 해보고 싶나.
=한국영화에서 안 쓰는 독특한 음악을 해보고 싶다. <그녀에게> <나쁜 교육>의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버스>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존 브라이언의 음악을 좋아한다. 종이 찢는 소리를 녹음해 리듬을 만들어낸 존 브라이언처럼 독특한 질감의 소리를 쓰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 악기 구성도 일반적이지 않게 하려고 한다. <최종병기 활>에서 해금 대신 몽골 악기 마두금, 피리 대신 일본의 사쿠아치(전투를 벌이기 전 신호를 내는 악기)를 사용했던 걸 예로 들 수 있을 거다.
-<코리아> <점쟁이들> <타워> 등 차기작 음악에 대해 힌트를 준다면.
=<코리아>는 스포츠영화이자 멜로영화다. 일반적인 스포츠영화의 음악과는 거리를 뒀다. 관객이 음악을 듣고 “어, 이거 멜로영화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코리아’ 하면 으레 생각하는 애국주의적인 느낌의 음악은 100% 배제했다. <점쟁이들>은 코믹물이지만 공포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음악은 철저하게 무서울 거다. (웃음) 악기도 워터폰을 활용하는 등 독특한 질감의 소리를 사용한다. <타워>에선 철저하게 현실적인 음악을 할 거다. 긴장감을 높이는 음악을 집어넣는 순간 뻔해질 것 같아서. 퀄리티에서도 욕심을 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