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난 마트 진열대에서 대여섯건의 ‘가격혁명’을 목격한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수사로 기능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정치적인 사건으로서의 혁명은 마치 오래된 유품처럼 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체 게바라 티셔츠도 더이상 핫 아이템이 되지 못하는 지금, 혁명이라는 단어는 이미 휘발되어버린, 아득한 열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흑인 민중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구를 빌리자면, 그것은 바싹 마르거나 축 늘어진 “지연된 꿈” 같은 것이다. 도저히 나부끼는 깃발, 조밀한 스크럼 사이로 솟구치는 함성, 혈관을 덥히는 열기…, 혁명이 환기하는 이미지들은 여전히 센티멘털리즘을 자극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는 향수 속에 과거의 절박한 신념들에 대한 무지와 패배의식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때로는 우연한 계기가 실패한 혁명과 같은 불온한 유산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랜드 앤 프리덤>(1995)도 그러한 계기들 중 하나였다. 영국의 한 소녀가 할아버지 데이빗이 남긴 유품 속에서 옛 신문조각, 사진과 편지더미, 그리고 흙을 감싼 붉은 손수건을 발견한다. 젊은 데이빗의 음성이 편지를 읽어가는 동안, 화면은 그가 스페인 민병대에 가담해 파시스트 군부와 싸우던 1936년으로 옮아간다. 그러나 혁명의 대의는 좌익세력의 분열과 함께 곧 변질되고, 데이빗은 동료들을 등지며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합류했다가 다시 민병대로 복귀하는 갈등을 겪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민병대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 토지문제를 의논하는 토론 신이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싸웠던 거야”라는 절망으로부터 “난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아, (언젠가) 그날은 올 거야”라는 확신으로의 도약이 매우 자연스럽게 납득되던 결말은 여전히 놀랍다. 켄 로치 감독은 혁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혁명세력이 치부를 드러내며 붕괴되는 과정을 담으면서도, 그것이 이들의 꿈 자체에 대한 회의나 낙담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 겪는 모든 인간적인 번민과 좌절이 처참한 실패 속에서도 결국은 유의미하다는 것을, 그는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한 혁명은 회오를 동반한 상처의 흔적일 때가 많다. 반복을 거듭하는 역사의 특성 탓일까. 여전히 어떤 영화들은 데이빗의 손녀처럼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처를 애도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읽으려 한다. “혁명은 영화가 아닌 바깥 세상에 속한 것이다”라는 파스빈더의 언급은 영화의 탈정치적 위상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 테제를 통해서 오히려 그의 영화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명시하고자 했다. 꿈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곪고 산화된 꿈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 패배와 환멸의 자리에서 비관적인 현실의 메커니즘을 응시하는 작업은 때로 프로파간다의 경우보다 더 적극적인 정치성을 갖는다. 과거를 기억하는 피로한 행위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현실 변화에 기여할 거라 믿는 것은 그저 순진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종결된 과거, 혹은 미학적 사유의 대상일 혁명이 지금 이 순간 절박한 과제가 될 도처의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이 역시도 섣부른 기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이들에게 줄 명징한 울림 앞에서, 나의 확신은 그저 얄팍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