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영화 <반두비>에서 백진희가 연기하는 여고생 ‘민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급료를 떼어먹은 사장의 집으로 쳐들어가, 거실 탁자에 놓인 <조선일보>를 흔들며 외친다. “만수야, 언제 인간 될래? 이 따위 신문이나 읽으니까 네가 쓰레기처럼 살지!”라고. 영화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면 신동일 감독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2006년의 일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영화의 제작스탭으로 두어달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제작실장이었던 선배를 불러 감독님이 말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영신씨,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모든 제품은 S전자의 것들이어야 해요. 대한민국은 S공화국이니까.” 난 신동일 감독의 그런 직설적인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가 지적한 디렉션은 연출적이기보다 정치적 의도에 더 가까워 보였는데, 극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작은 디테일이기도 했다. 물론 저예산 예술영화를 꾸려가야 하는 제작팀한테는 곤란한 요구였다. 협찬을 받을 여지가 사라져서다. 하지만 제작실장은 한숨을 쉬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라고 답해야 했다.
그러니 신동일 감독의 다음 작품인 <반두비>를 보면서 웃음이 났던 것은 아마 감독의 의도를 조금은 더 잘 안다고 믿었던 까닭이었을 거다. 민서가 신문을 던지는 과격한 액션을 취하며 대사를 내뱉는 것을 보았을 때, 아무리 디테일하게 도배를 해도 드러나지 않던 구석진 의도들이 전면에 드러난 것이 괜히 반가웠다. 간혹 영화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유연하지 못한 설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럼에도 난 그 저돌적인 맑은 태도가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정치영화에서 사용되는 미디어의 역할은 다소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그 ‘다이렉트한 대담함’이 핵심이다.
사실 대부분의 정치영화에서 신문이나 방송 등의 ‘미디어’가 언급될 때, 이는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뮌헨>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1972년의 뮌헨올림픽 개막 직전에 일어난 테러사건을 보도하는 TV화면에서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당시의 보도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다. 대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사실의 이면, 그 진의를 추적하기 위해 영화는 두 시간여를 사투한다. 조금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들도 마찬가지다. <화씨 9/11>과 <볼링 포 콜럼바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무어 영화들은 ‘정황적 사실(fact)’이라 불리는 뉴스 등의 기록이 ‘편집상의 조작’으로 인해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라 이른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 그런 건 그 속에 없다고 말이다. 다큐멘터리까지도 ‘사실’을 의심하는 지금의 극장가에서, 영화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바는 다소 명확해 보인다.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에 대한 중대한 지각변동이 지금, 바로 관객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또한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도 더이상 보도되는 화면을 전부 믿진 않는다. 하긴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 아닐까? 사실을 담는 가장 포괄적인 그릇일 테니까. 니체의 말마따나 진실은 없다. 주관적인 해석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