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누가 테러리스트를 만드는가
2012-04-0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테러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
<다이 하드4.0>

“테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뭐야?”라고 옆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키보드를 누르며 말한다. “도마 안중근.” 테러와 관련해 검색하다 보니 숙제하던 학생이 올려놓은 듯한 질문이 보인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테러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 근거에 대해 좀 알려주세요.” 댓글 전쟁이 펼쳐진다. 채택된 댓글의 요지는 ‘테러는 의거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없다’였고 이에 민족정기 충만하신 분이 분기탱천하여 올린 긴 반박의 댓글이 뒤를 잇는다.

테러는 공포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과 고통을 야기한다. 테러에 대한 공포는 일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이며 생명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모욕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거둘 때 가장 완벽한 삶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데 테러는 그 가능성을 불시에 차단한다. 안중근의 행위를 ‘의거’와 ‘테러’로 엇갈리게 호명할 수 있는 건 그 안에 행위의 폭력성과 정치적 정당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 엇갈림에 대한 판정은 누가 카메라의 시선을 장악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체로 할리우드영화들의 시선은 단호하다. 테러에 대한 엄정한 판결과 인간적인 형사의 분투를 그린 <다이 하드> 시리즈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테러의 양상에 민첩하게 대응해왔다. 구소련의 발레리노를 연상케 하는 1편의 테러리스트들부터 사이버테러를 감행하는 <다이 하드4.0>의 해커까지 이 영화의 주적은 늘 ‘최첨단’ 테러리스트들이며 존 맥티어넌은 테러 위협에 처한 무고한 시민과 함께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 자신의 가족을 구한다. 전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을 스크린으로 소환하는 미국영화에서 ‘테러’ 사용 목적은 대체로 아주 단순하다. 지젝은 이처럼 세계 제국으로서 미국이 보여주는 태도를 ‘세계적으로 행동하고, 국지적으로 사고하라’라는 한마디로 꼬집는다. 국민에게 위기의식을 고무하고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함으로써 자국의 국방력 강화와 타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쟁은 “불안과 동요로만 접근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죽음이 그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뮌헨>은 그 ‘불안과 동요’를 흉내낸다.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평화와 화합의 상징들이 또 다른 죽음을 야기하는 ‘우리’가 있다. 하지만 테러에 테러로 맞서던 ‘우리’의 단호함은 점점 의심으로 붕괴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의심하지만 화면은 단호하다. 총알받이가 된 시신들이 모종의 쾌감을 위해 전시된다. 애브너와 그의 동료들은 갈등에 빠진 ‘맥티어넌’이며 기분 나쁘게 반짝거리는 눈과 검은 피부를 가진 테러리스트들에게 총구를 겨눈 <블랙 호크 다운> 병사들의 쌍생아들이다.

‘테러’는 현실 정치의 파국을 의미한다. 발생하지 않은 ‘테러’는 현실의 부조리를 봉합하기 위해 활용되지만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정부는 현실의 곤란을 타개할 힘이 없어 종교와 신념을 악용한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블라이드 폴드>에서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한 아들은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자살폭탄을 안고 성전(聖戰)에 참가한다. ‘천국을 위하여’ 선택한 폭탄이 보장하는 것은 ‘삶의 종말’이지 ‘영원한 생명’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죽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정권/종교도 답이 될 수 없음을 <천국을 향하여>의 여정이 야기하는 ‘불안과 동요’를 통해 목도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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