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수염은 뽀빠이의 자존심인데 그걸 마카오 박한테 뜯긴 거지!” 차분히 말하던 이정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멋있다’라는 표현보다 ‘허세’라는 표현이 어울릴 콧수염을 자존심처럼 지키는 남자, <도둑들>의 뽀빠이는 그런 남자였고 이정재는 뽀빠이가 된 것처럼 장난기 섞인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뽀빠이에게 마카오 박은 그가 훔치고 싶은 것들을 모두 갖춘 동경의 대상이자 언제라도 짓밟고 싶은 가장 큰 적수다. 그래서 마카오 박에게 뽀빠이의 콧수염이 무참히 뜯기는 순간 관객은 묘한 쾌감과 함께 발가벗겨진 뽀빠이를 목격하게 된다. 그날, 가장 치욕적인 순간인 ‘콧수염 장면’을 설명하는 이정재는 다시금 그 현장에 선 것처럼 보였다.
얼핏 허세어린 콧수염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캐릭터 같지만 뽀빠이는 <도둑들>에서 탐욕, 사랑, 배신, 동경 등 자신의 내면을 가장 다양하게 드러내 보이는 인물이다. 이정재 역시 “본인은 굉장히 명석한 줄 알지만 실은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인 그런 이중적이고 바보스러운 면에 끌렸다”고 말한다. “악당 역할이라고 듣고 시나리오를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뽀빠이가 크게 악당이라 여겨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둑답게 훔치고 싶은 대상을 맹렬히 좇았을 뿐이니까. 그게 사람이든, 사랑이든, 다이아몬드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다 도둑인데 도둑질했다고 악당은 아니지 않나.”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후 2년 만에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 뛰어든 그는 이번 영화를 “잘 그려진 악보”라고 말한다. 이정재는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너무나 명확하게 짜인 이야기를 따라 “정확히 음을” 냈다. 큰 디렉션도 없었다. 최동훈 감독은 그에게 “최대한 멋있게 보이지 말라”고 주문했다. 이정재 역시 남이 10개를 탐내면 30개를 노리는 뽀빠이의 탐욕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 결과 뽀빠이는 “가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무엇이든지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은 인물”로서 배신이 판을 치는 도둑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아이를 돌봐주는 하녀를 쉽게 탐하는 <하녀>의 주인집 남자 훈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뽀빠이는 훈보다 훨씬 뻔뻔하고 치밀하다. 그러나 그가 비열해지고 치밀해질수록 뽀빠이는 반짝 빛을 낸다. 뽀빠이 아니, 도둑들이 명석하게 두뇌를 굴려 적을 따돌리고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의 쾌감이 숨을 몰아쉬게 만들 만큼 짜릿하기 때문이다.
김혜수, 김윤석과는 다르게 <도둑들>로 최동훈 감독과 첫 만남을 이룬 이정재는 그를 두고 “핵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칭했다. “큰 스토리 라인을 구축한 와중에 여러 캐릭터에 색을 입혀 배열 또한 훌륭히 해냈다. 대사는 또 어떤가. 그냥 지나가는 말 같지만 그 안에 자신만의 철학 같은 게 묻어나더라. 근데 또 그게 거창하지 않고 유머와 섞여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어떤 의미로는 (그가) 무섭다. (웃음)” 최동훈 감독이 꾸려놓은 도둑의 세계는 이정재에게 “호흡이 척척 맞는 즐거운 현장”으로서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최동훈 감독이 “이정재와 꼭 한번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정재에게나 최동훈 감독에게나 <도둑들>은 꽤 멋지고 강렬한 첫 만남이다.
현재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를 촬영 중인 그는 “유쾌한 <도둑들>”에서 빠져나가 “어두운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국내 최대 범죄조직에 잠입한 형사 ‘자성’이 된 이정재는 김혜수, 김윤석, 전지현, 김수현, 임달화만큼이나 화려한 최민식, 황정민을 상대한다. 역시나 배신과 음모가 교차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이정재는 영화 제목처럼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 세계마저 자신의 손에 꼭 넣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득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