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이 인터뷰가 <타짜>의 정 마담과 <도둑들>의 팹시에 대한 비교가 아니면 좋겠다.” 아마도 <도둑들>의 합류를 결정하고 가장 많이 들었을 질문. 김혜수는 그 비교를 일단 내려놓자고 제안한다. “흔히 말하는 이전 캐릭터를 뛰어넘는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좋은 건 좋은 것대로 보존돼야지, 만날 자기를 뛰어넘고 싶지도 않고.”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저음과 고음을 절묘하게 오가는 어투, 똑 부러지는 화법. 확신에 찬 태도. 인터뷰를 하는 그녀의 모든 것이 정 마담의 것을 똑 닮아 있다. <타짜>의 정 마담은 배우를 관찰하고, 그 배우의 말투와 표정까지 시나리오에 반영하는 최동훈 감독에게 포착된 자연인 김혜수가 틀림없다. 어쩔 수 없지만, 이러니 팹시와 비교를 시도할밖에 없다. <타짜>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도둑들>의 팹시엔 어떤 김혜수가 반영되어 있을까. “감독님이 정 마담을 내가 가진 외적 이미지의 결정체로 만든 거였다면, <타짜> 이후엔 내 개인에 대한 걸 알게 될 기회가 있지 않았겠나. 그런 것에 좀 가까운 거다. 그게 뭔지는 감독님한테 물어봐야지.”
<도둑들> 중 금고털이 역할로 기능하는 팹시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는 대형 프로젝트에 합류한 여자다. 예니콜(전지현)이나 잠파노(김수현), 홍콩쪽 도둑들과 달리 그녀는 마카오 박(김윤석), 뽀빠이(이정재)와 4년 전 팀을 이룬 전적이 있고, 당연히 드라마의 중심을 차지하는 캐릭터다. 팹시가 교도소 문을 걸어나와 차에 올라탄 뒤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순간. 도대체 이름이 왜 팹시냐는 예니콜의 질문에 대뜸 “톡 쏘는 게 성격이 좆같나보지”라고 거침없이 쏘아붙일 때까지. <도둑들>을 보는 관객이 앞으로 목격할 건 한국영화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여배우의 존재감이다. 클로즈업된 마스크만으로도 김혜수는 화면이 터질 것 같은 압도적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존 카사베츠의 뮤즈였던 지나 롤랜즈가 <글로리아>나 <얼굴들>에서 보여줬던 절박한 고전미에 비교된다 싶다. 정 마담이 애써 캐릭터를 만들 필요가 있는, 주로 내세워야 빛이 나는 배역이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마카오 박과 과거부터 연결된 순정의 멜로라인에서 김혜수는 캐릭터를 내려놓고, 잔잔한 마음의 파고를 조율한다. 찐득하고 애잔하며 아련하다. 쟁취보다 후퇴의 사랑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톤은 안정되고 독보적이다.
<도둑들>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김혜수는 한 차례 거절했었다. 작품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당시 일에 집중할 에너지가 너무 약한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내가 제일 늦게 합류했다. 시작부터 밸런스를 놓쳤기 때문에 걱정을 좀 했다. 그때 팹시와 마카오 박 빼고 도둑들이 모인 인트로 촬영 컷을 보는데, 굉장하더라. 카메라를 따라가다, 배우를 따라가다 이쪽저쪽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바빠지더라. 우리 영화가 볼만하겠다 싶더라. 정말 정신 차려야지, 이건 다른 핑계를 댈 수 없겠구나 싶었다. 용기도 얻었고, 그 힘으로 홍콩, 마카오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김혜수에게 견제와 긴장, 독려가 오가는 최동훈 감독의 현장이 주는 쾌감은 특별하다. “<타짜> 끝나고 이후에 누군가가 최동훈 감독과 작업을 하겠지만 그게 여자건 남자건 어떤 에이지(나이)건, 부러웠다. 왜냐하면, 난 아니까. 이 작업이, 이 현장이 너무 좋다는걸. 활기차면서도 진중한 현장이 무엇인지도. 이런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다.”
열심히 올인한 과정이 이제 끝났고 김혜수의 만족은 여기까지다. “연기를 잘했냐, 흥행이 되느냐는 이후의 문제다. 일단 시작하면 하는 거고 연기하고 녹음하면 끝이다. 영화가 좋다고 더 악으로 깡으로 하는 건 아니다. 다 열심히 하는 거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다. 난 모든 영화를 그렇게 한다. 이후에도 그럴 거고. 그다음은 모른다.” <도둑들>의 바쁜 배우들과 달리 김혜수는 아직 차기작이 없는 ‘한가한’ 상태다. “내가 좀 띄엄띄엄이지. 일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주의다. 돈이 필요해도 마음이 안 가면 안 한다. 그런 건 예전에 많이 했고, 이젠 그런 거 못한다. (웃음) 개인적으로나 일적으로나 원하는 걸 하고 싶은 순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난 그렇게 하고 있다. 어쨌든 여자다, 여배우다, 주인공이다, 조연이다 이런 걸 떠나 최소한 아직까지 캐릭터로 영화에 접근하고 있다는 건, 내가 정말 운이 좋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