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당신의 그 미세한 흔들림을 알아요
2012-08-07
정리 : 이주현
배역-<벌새>의 학원 선생 김영지

TO 배우 김민희

“그가 흔들리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영혼 안에 그가 조용히 꽃등을 켜 들고 들어선 것은 그 흔들림의 자질 때문이라는 걸.” -김정란 <여자의 말> 중에서 제가 ‘진짜’ 당신을 알아보게 된 것은 식당에서 우연히 본 노희경의 드라마에서였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의 표정 속에 담긴 어떤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그 뒤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당신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 일화를 이야기했어요. “바보같이 보여서, 그런 모습이 싫어서 집에 와서 엉엉 울기도 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거기가.” 그리고 당신은 <화차>에서, 결혼하자 조르는 애인에게 묻지요. “결혼하고 나면, 그다음은?” 그때의 그 쓸쓸한 표정이라니. 왠지 난 당신을, 그 미세한 흔들림을 아주 잘 알 것만 같았습니다.

전 영화를 만드는 여자예요. 이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제가 영화를 만드는 여자라는 것이 참 좋아요. 지난해엔 <리코더 시험>이라는 단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고, 현재 그 단편을 토대로 한 장편 <벌새>를 준비 중입니다. 다행히 프로듀서도 구했어요. 저희 영화사 ‘Torch Film’은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탄 작품 <Aqui y Alla′>를 제작했답니다. 아직은 막 시작하는 미국 독립영화사지만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요.

<벌새>는 14살 여자아이 은희가 사랑을 갈구하며 삶을 목도하는 이야기예요. 해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입니다. 모두가 부자인 대치동에서, 중학생 은희는 참기름집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요. 가족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은희는 유일한 친구인 지숙과 물건을 훔치고, 동네 날라리들의 명소 아베크 노래방과 스카이 커피숍을 들락거리며, 남자아이/여자아이 모두와 연애를 하며 섬처럼 떠다녀요. 은희는 대치동의 다른 애들이 그러하듯 방과 후에는 학원을 찍죠. 은희는 지숙과 함께 한문학원에 다니는데,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어른, 김영지 선생님을 만나요. 바로 이 캐릭터가 당신이 해주었으면 하는 역할입니다. 영지는 무뚝뚝하고 중성적인 느낌의 여대생입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거짓 웃음으로 대하지도 혹은 훈계하려 들지도 않아요. 영지는 그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한 ‘사람’을 대하듯 은희를 대하고, 은희는 그런 선생님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영지는 은희에게 노래를 불러준다며 운동권 노래인 <잘린 손가락>을 부릅니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컥덜컥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자신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가사지만 은희는 어쩐지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제겐 당신이 무표정하게 먼 곳을 응시하며 소녀들 앞에서 <잘린 손가락>을 부르는 장면이 선연하게 그려집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내가 당신을 만날 기회가 생길까요? 당신은 이 기사를 보게 될까요?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젠가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고 수줍게 고대해봅니다. 건강하세요.

FROM 감독 김보라

감독 김보라는?

1981년생.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졸업 뒤 “다른 지형에서 영화를 체계적으로 배워보고픈 마음”에 유학을 떠났다.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 영화과에 진학했고, 대학원 졸업작품 <리코더시험>(2011)이 미국감독조합 학생영화상, 우드스톡영화제 학생 단편영화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어릴 적엔 “만화 덕후”였다. 현재 <벌새>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그 외 단편으로 <계속되는 이상한 여행>(2002), <빨간구두 아가씨>(2003), <귀걸이>(2004)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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