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정글의 법칙 in 스크린
2012-08-07
정리 : 이주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배역-<스물세 번째 사람>(가제)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

TO 희극배우 김병만

이즈음 저는 한 과묵한 남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아르곤 용접공으로, 중동수출용 송유관을 용접하는 일을 합니다. 남자는 여러모로 재주가 좋은 사람입니다. 노동자 버전의 맥가이버랄까요. 이것저것 뚝딱 만들어내는 수완도 좋고 땅딸막한 몸을 잽싸게 놀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상황을 막아내기도 합니다. 게다가 스무살 때 만나서 결혼까지 이른 아내는 얼마 전 오랫동안 기다려온 둘째를 가졌습니다. 오후 햇볕이 좋으면 괜히 기분이 들떠서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행복, 남자는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저녁, 큰아이가 남자의 품에 안기며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밉니다. 거기엔 원본과 조작본이 함께 복사되어 있는 회계장부, 복잡한 계산식과 법률용어가 빼곡히 들어찬 날인 계약서 등이 들어 있습니다. 남자는 어쩐 일인지 이 서류의 출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자신이 훔쳐냈다가 스스로 파기했던, 어느 대기업의 회계부정을 증명하는 서류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이것을 자신에게 보내온 사람을 찾아내는 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놓은 ‘적당한 행복’이 속절없이 사그라지고 말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 내부의 치킨게임(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임-편집자)을 시작합니다. 남자의 발걸음은 그가 3년 전 해고당했던 자동차 공장으로 향합니다.

뜬금없이 설익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저는 영화를 만드는 신이수라고 합니다. 수줍은 팬심을 드러내며 인사를 드리면 좋겠지만 저는 그 유명한 ‘달인’ 시리즈도 진짜 재밌다고 추천받은 몇개만 골라서 본 엄청 게으른 시청자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마지막까지 희극배우로 남고 싶다는 배우님을 보며 저는 아무래도 잘 웃을 수가 없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런 기분을 갖게 된 데에는 배우님의 위태로운 작업들과 거기에 드리운 ‘죽음’에 대한 저의 삿된 망상이 한몫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수백 갈래의 줄기로 제 몸을 칭칭 감아올린 적도의 팜트리를 겅중겅중 기어오르다가 발을 삐끗하던 순간,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의 추락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화면 속 당신은 농담처럼 나무 꼭대기의 야자수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저는 곧 그 불길한 연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 게으른 목격 속에서 당신은 항상,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 채 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한 남자의 죽음에 배우님의 웃는 얼굴을 입힌 것은, 따라서 제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 남자가 제 손에 쥔 한줌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이 가진 가장 정직한 재주를 가장 정직한 형태로 구사하는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한 회사의 비위문서를 캐내기 위해 맨손으로 고층빌딩을 기어오르는 일이든, 진실을 외치기 위해 백척간두의 공중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일이든 간에 말이죠.

무더위가 다 서러운 날들입니다. 언제 맥주라도 한잔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투자에 난항이 예상되는 이 시나리오의 가제는 <스물세 번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존경하는 심보선 시인의 시제를 허락없이 빌려왔습니다).

FROM 감독 신이수

감독 신이수는?

1981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전문사 과정)을 올해 3월 졸업했다. 단편 <너에게 간다>(2012), <라라에게>(2009), <나를 떠나지 말아요>(2006) 등을 연출했고 <경복>에는 배우로 출연한다. <너에게 간다>는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 경쟁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현재 이창동 감독의 신작에 조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때 좌절감과 패배감이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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