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당신은 한국의 클로에 셰비니
2012-08-07
정리 : 이주현
배역-<스토크린>(가제)에서 우울증에 빠진 20대 예비신부

TO 배우 김고은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꿈결의 옹알이처럼 흘러들어 왔다가 의미없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면 새벽 세시다. 그 정도 상태가 되면 난 모니터 앞을 벗어나 밤마실을 나간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호젓하게 거니는 것이 좋다. 날씨가 추울 땐 밤마실이 지금보다 잦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야간비행>이라는 단편영화의 이미지를 채웠다. 밤마실을 다니면서 담배를 태우는 것도 좋아한다. 길 위에서는 마지막 한 모금이 아쉽다. 그래서 영화에 담배 피우는 장면이 여럿 나온 것도 같다.

졸업을 하기 위해 단편영화를 찍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야간비행>이 배급되고 초청되기 시작했다. 1~2년 정도 영화를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른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일은 더 힘들어졌다. 밤마실을 다녀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루하루 영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이 마치 깊은 늪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들어가는 기분이다. ‘멘털 붕괴’라는 표현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황 상태에서 문득 떠오른 학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저예요.” “응. 어쩐 일이야?” “배우가 필요해요.” “어떤 배우를 찾는데?” “김고은 같은 배우요.” 캐스팅을 앞두고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녀가 나온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의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영아>를 보았을 때도 그랬고, <은교>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나는 그녀의 눈이 좋다. 슬픈 눈일 때도 어울리고 기쁜 눈일 때도 자연스럽다. 예쁘면서도 예쁘지 않다. 단언컨대 어떤 카메라라도 그녀의 이미지를 사랑할 것이다.

지금 여고생이 나오는 단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주변에서 레퍼런스 이미지를 요구할 때 그녀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그 정도의 드라마를 가진 배우를 또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준비된 배우이기도 하다. 과감한 역할을 맡을 용기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어떤 역할을 시켜도 소화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가 과연 그러하다. 외국 배우 가운데 클로에 셰비니를 사랑한다. 한국에도 클로에 셰비니처럼 준비된 배우가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그중 하나로 김고은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겠다.

장편영화를 찍는다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제목은 <스토크린>(가제). 이 영화는 좋은 집안, 괜찮은 수입, 남부럽지 않은 장래가 약속된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신부가 깊은 우울증에 빠져버린다.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불안과 사랑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그때 축가를 불러주기로 한 남편의 친구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신부는 남편의 친구와 함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우발적인 만남과 우발적인 관계에 빠져든다. 이따금 이야기의 장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20대 회사원인 그녀가 술을 마신다. 욕조 앞에서 울고 있다. 남편의 친구와 잠자리를 가진다.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풍경을 본다. 만약 그 신부의 얼굴이 김고은의 얼굴이라면 어떨까. 황홀할 것 같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FROM 감독 손태겸

감독 손태겸은?

1986년생.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다큐멘터리 <해피엔딩>(2010)과 단편 <야간비행>(2011)을 연출했다. 돈을 위해 남자와 관계를 맺는 10대 소년의 이야기 <야간비행>은 제64회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3등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후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잘하고 싶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기분 좋은 추억인 동시에 독”이 된 수상이랄까. 현재 단편영화를 작업 중이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