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special] 이미지, 빛, 현실… 영화의 사제를 영접하라
2012-10-05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부산에서 특별전 열리는 그루지아 출신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영화세계
<파라자노프: 마지막 봄>

보르헤스는 에드가 앨런 포를 논하면서 작품에 다른 것, 더 중요한 것을 덧붙일 때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투사되는 작가의 이미지 말이다. 영화 작가에게도 이 말이 유효할 때가 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수난을 겪었던 그루지아 출신의 작가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두고 종종 ‘영화의 순교자’라 말하지만 파라자노프야 말로 말 그대로 순교자였다. <석류의 빛깔>의 첫 시작부에 나오는 문구처럼 그는 삶과 영혼에 시달린 시인이었다. 워낙 독특한 개성덕분에 그는 영화만큼이나 평생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68년에 완성한 <석류의 빛깔>(원래 제목은 ‘사야트 노바’였다)은 영화의 역사 그 어디에도 빚지지 않는 독특한 영상과 수법,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적인 아름다움을 도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소련의 영화계에서 검열을 당해야만 했다. 동시대 타르코프스키의 <알렉산더 루블료프>(1966)가 상영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이 영화는 1971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파라자노프의 영화는 작품이 훼손되는 과정을 거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파라자노프는 이미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1965)에서 고대적인 전통과 민족적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영화계의 이단자로 취급받았었다.

<석류의 빛깔>

펠리니의 영화에서 자극받다

1973년 파라자노프는 키에프에서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1947년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동성애자 혐의로 체포된 것에 이어 이미 두 번째였다. 표면상 죄목은 외환 보유죄, 뇌물수수, 투기죄였지만 사실 그가 지나치게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체포 사유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한 소련 당국은 또다시 동성애자 추문을 조작해냈다. 1974년, 비공개 재판에서 파라자노프는 유죄판결을 받아 5년간 자유박탈을 당하고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트뤼포, 고다르, 펠리니, 파졸리니 등의 유럽 영화인들이 탄원서명을 했지만 그가 형기 만료 전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루이 아라공이 소련 정부의 훈장을 받으면서 브레주네프 서기장에게 탄원했던 것이 주요했다. 파라자노프는 수용소의 시절을 감독의 생명이 끊길 정도의 공포의 시기로 묘사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서 장편 시나리오 6편, 단편 100편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

그의 불행한 삶에 대해 언급한 것은 파라자노프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역정을 빠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작품을 변화시킨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태도가 이러한 삶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의 시간을 보내고 그가 영화계로 돌아와 만든 재기작이 <수람요새의 전설>(1984)이다. 그루지아가 이슬람국가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는데, 신앙심에 대한 침략이자 정신적인 침략에 저항해 영웅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그가 펠리니의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를 모스크바에서 본 후에 밝혔던 소회이다. 파라자노프는 자신의 무딘 팔을 질타하면서 펠리니의 영화와 비교해 자신의 필름을 태워버릴 만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그럴 정도의 영화는 분명 아니다. 다만 펠리니의 영화에 대한 그의 동경에서 파라자노프의 영화적 특징을 도리어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가령, 파라자노프는 펠리니가 유년기의 기억, 여성이나 음식, 태어난 땅에 대한 기억에서 예술적 자양분을 끌어오지 않았다면 평범한 작가에 머물렀을 거라며 예술가는 이미 아이 때에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작가의 자기고백에 가깝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감성과 기억을 영화의 귀중한 보물창고라 여겼다. 그의 작품은 모두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꺼낸 신선한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에 헌정한(타르코프스키는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음유시인의 고난과 행복을 그린 <아쉬크 케립>(1988)은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며, <석류의 빛깔>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유소년기의 기억이나 감정을 간직한 시인의 이야기다(영화에 등장하는 직물과 염색직공의 묘사는 아버지의 골동품 가게에서 경험했던 유년기 기억의 반영이며, 영화에 활용된 민족음악도 그가 트리비시의 예술학교를 다니면서 매료됐던 것들이다). <수람 요새의 전설>에서도 주인공은 어린아이의 감성을 여전히 유지한 청년이다. 그는 영웅이 된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해 자신을 희생한다. 유년기의 감성은 그에게 창작의 수원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죽음의 비극과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들이다. 파라자노프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의 근원성을 소중히 여기면서 농후한 민족색으로 전통적인 삶을 찬미했고 선현들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했다.

<수람요새의 전설>

필름의 관능성이 만들어내는 불온함

세르주 다네는 도브첸코 이후의 소비에트 감독들이(파라자노프의 영화학교 스승이 도브첸코였다) 서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감속과 불연속의 운동을, 그리고 무거운 질료들과 아주 농밀한 정물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파라자노프의 파격성은 어쩌면 주제도 내용도 아닌 필름의 관능성이 만들어내는 불온함에 있다 하겠다. 그는 시인에 관심이 많았지만 문학보다는 회화에 매혹됐고, 영화의 장면들을 독립된 회화로 간주해 대체로 카메라가 고정된 정면에서의 쇼트를 선호했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를 제외하자면(그는 이 영화의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의 고정쇼트는 깊이가 없는 평면적인 영상으로 시간과 공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배우의 연기나 섬세한 감정 묘사보다는 개성이나 특징으로 인물을 말하는 신체와 용모의 전형성(티파주)을 추구했다.

파라자노프는 1989년,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마침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영화제작을 준비하던 1990년, 66세의 나이로 파라자노프는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는 <고백>이라는 작품을 준비중이었다고 한다.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불과 3일 만에 촬영이 중단된 작품이다. 이번에 상영하는 미카일 바르타노프의 <파라자노프: 마지막 봄>에서 그의 미완성 작품의 촬영분을 확인할 수 있다. 파라자노프는 한 때의 분노는 잊혀지고 철조망도 수용소도 과거의 것이 되어가지만, 예술이나 민족은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뿌리가 있는 민족은 불멸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일찍이 고다르는 그의 영화를 지칭하면서 “영화의 사원에는 이미지들, 빛들, 현실이 있다. 파라자노프는 그 사원의 사제였다”고 말했었다. 파라자노프의 전시회도 마련된 이번 특별전은 그가 생애를 걸쳐 가꾼 사원을 제대로 산책할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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