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박중훈]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했다
2013-11-01
글 : 장영엽 (편집장)
정리 : 정예찬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톱스타>로 감독 데뷔한 배우 박중훈

“이번이 61번째 인터뷰예요.” 박중훈과의 만남을 위해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 <톱스타>의 홍보팀이 살짝 귀띔한다. 그런 홍보팀의 뒤편으로 의자를 옮기는 박중훈 ‘감독’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런 일도 직접 하세요?” 박중훈을 오랫동안 카메라에 담아온 <씨네21> 손홍주 사진팀장이 농을 건네자, “왜요, 이상한가요? (웃음) 인터뷰만 60번을 했는데, 진행 맡은 마케터 분들도 얼마나 힘드시겠어요”라고 대답하는 박중훈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살인적인 인터뷰 스케줄을 감당하는 수많은 배우들을 목격해왔지만, 박중훈처럼 인터뷰 장소에서의 모습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배우도 드물다. 일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직업인 톱스타들의 비상과 추락을 다룬 영화가 그의 첫 연출작이라는 점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박중훈 감독의 <톱스타>는 ‘한국 연예계 탐구생활’ 같은 영화다. 연예계의 시기와 질투, 협박, 각종 루머와 추문 등 수많은 ‘소문’으로 접해왔던 무대 뒤편의 이야기들이 그 자신이 ‘톱스타’이기도 한 박중훈의 시선으로 가공되어 재탄생했다.

-<톱스타> 시사회장에서 무대인사하는 배우들을 지켜보는 모습을 봤다. 흐뭇해 보였다.
=선배로서, 감독으로서의 마음이었다. 관객을 만나는 자리에서 돋보여야 하는 사람이 배우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돋보여야 하는 사람이다. 배우로 살아오면서 시사회장에서 자기가 더 나서는 감독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보기가 안 좋았다. 결혼식에서 신부보다 화려하지 않아야 하는 게 하객의 매너이듯, <톱스타> 시사회에서도 우리 배우들이 나보다 돋보였으면 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톱스타>를 보며 예전에 <씨네21>에 연재했던 ‘박중훈 스토리’의 여러 일화들이 생각나더라.
=내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를 대충은 가늠할 수 있겠네. (웃음)

-이 영화를 보고 뜨끔할 연예계 종사자들이 많을 것 같나.
=물론 있을 거다. <톱스타>는 ‘팩션’ 같은 영화다. 직접 실명을 거론할 순 없지만, 영화 속 최광철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을 테고. 멋있게 말하자면 <톱스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뜨끔해야 성공한 것이지, 특정 사람만 찔린다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남을 영화다.

-오랫동안 톱스타로 활동해왔는데, 불현듯 감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톱스타> 이전에 배우로서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이 <체포왕>이다. 영화를 보는데 어느 순간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신선하지 않게 느껴지더라. 예전에 했던 연기를 답습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보는 사람은 얼마나 식상할까 싶더라고. 더이상 스스로 성에 차는 연기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른 걸 해볼 만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라디오 스타>의 각본을 맡은 최석환 작가와 함께 <톱스타>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어떻게 공동 작업을 했나.
=기본적으로 대사는 내가, 구성과 타이핑은 최석환 작가가 맡았다. 그와 합숙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내가 열심히 대사를 쓰고 지쳐 쓰러지면 그가 정리하는 식이었다. 가상의 연기를 하면서 대사 하나, 조사 하나 꼼꼼하게 써내려갔다. 최석환 작가와 김광식 감독에게 시나리오 쓰는 법을 따로 배웠는데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컴컴한 절벽을 마주하고 그걸 올라야 하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는 게 괴로울 정도로, 초고를 쓸 땐 힘들었다.

-자전적인 이야기도 반영되었겠지만 할리우드영화 <이브의 모든 것> <선셋대로> 같은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 무의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주인공의 비상과 추락을 다룬(rise & fall)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테마를 가진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스카페이스>인데, 그 영화를 100번 이상 본 것 같다.

-20대 배우를 염두에 두고 <톱스타>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들었다. 엄태웅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며 이야기가 수정된 부분이 있나.
=기술적인 측면 말고는 전혀 바뀐 게 없다. 처음엔 20대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줬는데 많이 거절당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태웅을 태식으로 캐스팅한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태식에게 바라는 건 두 가지였다. 심리 변화를 크게 겪는 인물이기에 선한 이미지의 배우가 하길 원했다. 또 뭘 해도 잘 안 채워질 것 같은 결핍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배우이길 원했는데, 엄태웅이 적역이었다. 20대의 느낌을 주는 배우들의 특징이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인데, 동시에 선한 느낌을 주는 배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김민준이 톱스타 장원준을, 강성진이 연예부 기자를 연기한다. 두 배우 모두 기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을 맡았다. 더불어 극에서 태식의 매니저로 출연하는 상철 역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 이준혁을 캐스팅했다. 배우 출신 감독이 배우를 보는 눈은 좀 다르구나 싶더라.
=시사회 이후 김민준에 대한 반응이 좋다. 내가 볼 때 김민준은 톱스타의 기질을 가졌지만 자신이 지닌 것보다 과소평가된 배우다. 숨겨진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이 친구가 장원준을 연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성진은 아주 친한 후배인데, 임팩트가 있어야 하는 박 기자 역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준혁 배우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단역을 맡은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데 연기를 무척 잘하더라. 나는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연기자가 필요했다. 물론 주연배우는 유명세와 연기 모두 겸비해야 하겠지만, 조연은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가 맡아야 한다. 그래서 상철 역에 이준혁 배우를 캐스팅했다.

-캐스팅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거절당한 일화는 배우 시절엔 결코 겪지 않았을 경험이다. 예전에 ‘박중훈 스토리’에서 시나리오를 거절하는 나름의 방법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다.
=평생 의뢰만 받고 수락, 거절하는 일만 해오다가 직접 의뢰를 하고 거절을 받아보니 너무 힘들더라. 내가 생전 겪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니 나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리 못났나’ 싶은 자괴감도 들더라. 이걸 이겨내는 것, 아니 견뎌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이해는 되면서도 막상 겪어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게 스탭을 꾸리고 촬영에 들어가면서도 생각이 많았을 법하다.
=‘모르는 건 오픈하자’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영화 촬영현장을 법정으로 비유하면, 감독은 판사의 역할이다. 감독은 최종 결정권자이면서 책임자다. 모두가 판사를 바라보고 판사는 모두를 바라봐야 한다. 나는 28년 동안 이 법정에 있었다. 판사석에 앉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검사, 변호사, 배심원 등 모든 자리를 겪어봤다. 하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는 날 현장에 가서 판사의 마음으로 모두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래서 모든 걸 오픈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굉장히 편했다. 사실, 모르는 데 아는 척하면 결국 전문가들에게 들킨다.

-스탭들에게 당부한 점도 있나.
=절대 소리 지르지 말고, 화내지 말라는 것. 대신 스탭들에게 상식적인 휴식 시간은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영화 현장을 경험한 데서 나온 원칙인가.
=맞다. 난 현장에서 화내는 감독들이 그렇게 싫었다. 리더가 팀원들과 가장 소통하기 쉬운 방법이 화내는 거다. 하지만 가장 효과가 없는 방법도 화를 내는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의 인성을 위해서라도 <톱스타> 현장에선 화를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후배들은 내가 왠지 한 성격 할 것 같고, 선배가 감독과 제작까지 맡은지라 내 맘대로 할 거라는 걱정이 있었나보다. (웃음) 좋은 관계가 유지되어야 나중에 다른 일도 같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서로 부족한 점이 있어도, 영화적으로 허용되는 오차 범위 안에만 있으면 그냥 가자고 했다.

-청룡영화제 시상식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제에서 촬영한 장면도 있나.
=한컷만 방송사에서 사고 나머지 장면은 대부분 직접 촬영했다. 그때가 아마 2년 전일 거다. <톱스타> 투자를 받기 전이라, 직접 돈을 들여 장비를 대여하고 방송사에 허가를 받아 청룡영화제 시상식을 촬영했다. 관객의 입장에선 시상식에 가면 레드카펫의 화려함을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막상 그곳에 서는 배우들은 큰 운동 경기에 나가는 기분이다. 턱시도나 드레스를 입고, 여배우들은 아침부터 메이크업에 분주하다. 리무진을 타고 시상식장에 도착한 뒤에도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타이밍을 신경써야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올림픽 본선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촬영팀에도 스포츠 중계하듯 그 장면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애니 기븐 선데이>의 미식축구 장면처럼.

-스타라면 으레 받는 카메라 플래시의 불빛을 활용한 촬영과 조명이 인상적이더라.
=배우로서 경험해온 바에 의하면, 스트로브(카메라 촬영에 쓰이는 플래시)는 주목과 관심의 상징이다. 시상식에 남우주연상을 받으러 갈 때도, 치부가 드러날 때에도 스타라면 숙명적으로 스트로브를 받게 되어 있다. 사실 스타가 받는 주목과 관심을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선택’은 화려한 미술이겠지만, 정해진 예산 안에서 그걸 구현해야 했기 때문에 <톱스타>의 경우엔 조명이 중요했다. 최대한 직광은 피하고 램프광을 사용하려 했다. 촬영과 조명팀에 긍정의 주목은 화사하게, 부정의 주목은 그로테스크하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연기에 대한 인상적인 대사가 두번 나온다. 원준이 태식에게 “대사가 아니라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거야”라며 뺨을 때리는 장면, 그리고 톱스타가 된 태식에게 대선배 경민(안성기)이 “연기라는 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장면.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내가 쓴 대사다. 배우들도 내가 원하는 그대로 연기를 했다. 처음 대사는 내 연기관이다. 원래 “대사는 글로 외우는 게 아니라 뜻으로 외우는 것”이라는 표현도 시나리오에는 있었는데, 너무 복잡한 것 같아 뺐다. 두 번째 대사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처음부터 그 대사를 말할 배우로 안성기 선배를 생각하며 썼다.

-그러고보니 <톱스타>의 기획, 제작, 각본, 연출에 모두 참여했지만 출연만큼은 하지 않았다. 의도적이었나.
=그렇게 됐다. 내가 출연하면 이 영화의 진정성이 결여될까봐 걱정이 됐다.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자제를 했다. 나중에 또 영화를 만들 기회가 오면 감독도 하고, 출연도 해보고 싶다.

-교도소에 수감된 태식을 매니저 상철이 면회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현장에서 많이 울었다고 들었다. 태식이 구치소에서 나오는 장면을 무척 길게, 롱테이크로 찍었다.
=내가 (대마초 흡연으로) 수감 경험이 있잖나. (웃음) 다른 영화에선 대부분 교도소 장면을 면회자의 입장에서 찍더라. 감옥은 수감자 중심의 공간인데, 왜 항상 저렇게밖에 못 찍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수감자가 면회를 하러 나오기까지 먼 길을 걸어나와야 한다.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울컥 했던 장면인데, 배우가 감정을 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못 참겠더라.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울었다. 스탭들은 뒤에서 보며 낄낄 웃고 수군거렸다고 하던데. (웃음)

-어떤 의미에서 <톱스타>는 당신의 한 시절을 정리하는 느낌의 영화다.
=나의 20, 30대를 돌아보면 태식의 모습과 비슷하고, 지금은 원준에 가까운 것 같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내 안엔 김수로가 연기하는 최광철의 모습도 있고, 안성기 선배가 연기하는 김경민의 모습도 있다. 내가 앞으로도 <톱스타>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물론 영화감독의 일이라는 게 어떤 이야기든 자기만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것일 테지만, 정말로 육화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이야기를 한 감독이 살면서 몇편이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다음에 연출할 영화는 왠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다음에도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체화시키고 싶다. <라이프 오브 파이>와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든 리안 감독처럼 말이다. 그는 정말로 훌륭한 감독이라 생각한다.

<톱스타>의 개봉 전날, <씨네21>과의 인터뷰가 박중훈 감독에겐 마지막 일정이었다. 어쩐지 그가 연출자로서 첫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긴긴 밤을 보내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할 것 같냐”고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오늘처럼 <톱스타>의 홍보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고 박중훈은 답했다. 그러다가도 “내일모레가 되어 관객수를 눈으로 확인하면, 이민 가는 비행기 예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과 걱정 섞인 말을 건넨다. 28년 동안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수많은 ‘개봉 전야’를 경험해온 톱스타가, 지금 첫 연출작의 개봉을 앞두고 다시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고 있다. 너무도 익숙했던 그의 얼굴이, 불현듯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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