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을 거부하니 늘 창의적이도다."
수양대군은 어떤 인물? 왕을 꿈꾸는 야망가. 어린 조카 단종을 없애고 조선의 새 왕이 되고자 한다.
잊고 있었다. 이정재라는 배우가 굉장히 오랜 연륜을 가진 배우라는 것을! 그의 노하우는 ‘젊다, 잘생겼다. 신선하다, 트렌디하다’와 같은 수식어들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연기에 대한 열정과 철두철미함으로 매번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성실한 배우였다.
사실 수양대군을 어떤 인물로 그릴지, 캐스팅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 컸었다. 서른일곱살의 젊은 나이. 힘이 넘쳐나고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책봉되지 못했던 데서 오는 삐딱함, 콤플렉스와 욕망의 접합체. 내가 작품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수양대군은 이런 사람이었다. <하녀>를 보고 배우 이정재가 가진 세련된 고급스러움, 여유로운 모습을 수양대군에게 적용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형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정재라는 배우에게 대본이 가면 항상 창의적인 해석이 되돌아왔다. 한번은 수양대군 앞으로 뭔가 떨어지는 장면을 찍는데, 손을 휘휘 젓더라. 먼지! 그런 거다. 그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를 계산하고 신경 쓰는 연기를 해낸다. 편집을 끝낸 지금에 와서 보니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수양대군을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면 이 배우가 얼마나 사극톤의 대사를 잘 발성하는지,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카리스마를 얼마나 발산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기고 젠틀한 악역이 또 있을까. 세트 뒤에 누군가가 이런 낙서를 해놨더라. ‘수양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