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사랑의 유일무이성에 기댄 고백 속뜻 당신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다는 고백
주석 남자와 여자가 천신만고 끝에 빈방을 얻어서 들어온다. 이런 데 처음 와 봐. 떨려. 난 자기가 처음이야. ‘처음’이란 말에는 첫사랑이라 말할 때의 그 ‘첫’(first)이란 뜻이 배어 있다. 당신은 내 사랑의 시작이고 기원이고 출발지야. 두 번째(second)나 세 번째(third)가 아니라고. 그런데 조금 더 있다 보면 다른 사실이 폭로된다. 여긴 인터넷이 광랜이 아니네. 거품샤워하고 싶은데 안 되잖아? 에이, 2만원만 더 쓰지.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나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는데, 어째서 내 고백에서는 재방송의 냄새가 나는 걸까? 사실 고백하는 사람은 말더듬이일 수밖에 없다. 나, 나는, 다, 당신을, 사, 사, 랑해요. 고백하는 이는 반드시 체언 앞에서만 더듬는다. 추위를 타던 그의 혀는 조사나 용언 앞에서는 뱀처럼 미끄럽다. 그는 자신의 고백을 여러 번 다듬고 있는 것이다. 스케치하는 이가 윤곽을 잡기 위해 여러 번 선을 그리듯이. 저 고백을 다시 들어보라. 내가 두번, 당신이 두번, 사랑이 두번 반복되지 않았던가? 고백을 한 나도 둘, 고백을 받는 당신도 둘, 고백도 둘. 이것이 첫사랑이 데자뷔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다.
저 고백은 나와 당신을 절대적인 자리에 데려다놓는다.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필연이다. 사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우연을 건너뛰어서 여기에 당도했다. 부모님이 이 동네에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미팅 때 친구가 십분만 늦지 않았다면, 수능 때 1번에서 10번까지 답안지를 비껴쓰지 않았다면, 그때 졸다가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이 깜짝 놀라며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사돈의 팔촌이 복통으로 입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수많은 우연의 결과로 우리가 대면하다니 이것이 필연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것은 이상한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다. 엄마 고향은 대구, 아빠 고향은 전주, 내 고향은 수원. 그러니 우리가 만난 것은 신의 섭리예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수많은 우연의 집적만이 필연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는 처음 만났으나 이미 수많은 다른 만남들을 혹은 피하고 혹은 맞닥뜨리고 혹은 넘어서 이 자리에 왔다. 우리는 만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었다. 담요 위의 화투장처럼 나는 당신을 골라 들었다. 당신이 똥광이든 대보름이든 국진이든 간에. 이것이 처음이 데자뷔인 두 번째 이유다. 패를 뒤집은 건 처음이지만 당신은 다른 마흔일곱장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내 앞에 선 당신이 세 번째든, 열일곱 번째든, 내 대답은 한결같다. 당신이 내겐 처음이야.
용례 SF영화인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처음 당도한 빈집에서 쉬었다 가자고 하며 케이지(톰 크루즈)가 말한다. 처음 왔는데 우리 처음으로 커피 한잔하지. 자기는 설탕 넣지? 아, 세 스푼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