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 없는 문장은 길을 잃는다. 어딘가 응시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문장이 처한 위치가 어둠뿐인 암전 상태의 극장이어도 좋고 끝이 없이 빙빙 돌아가는 미로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주어는 종종 생략된다. 책은 목차가 없으며 소제목 없는 몇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단락 사이의 여백이 주네와 자코메티가 함께 보낸 시간을 가늠케 할 뿐이다. 책 속의 문장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작품은 조각가이자 화가인 자코메티의 것이다. 여기 있는 문장이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그’로 지칭되는 자코메티다. 그외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모델들인 작가의 아내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 그리고 자코메티에 관한 글을 남긴 샤르트르 등이다.
눈을 감고 더듬어보는 조각상
이 책에서 ‘우리는’이라는 주어는 이렇게 처음 등장한다. “오늘 오후 우리는 아틀리에에 있었다.”(14쪽)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66)와 장 주네(1910~86)는 자코메티의 작업실에서 두개의 두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코메티는 두상을 가리키며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해낸 것인데 별로 신통치 않다고 말한다. “싹수가 노랗죠?”(14쪽) 자코메티의 손을 통과하여 장 주네의 눈과 문장으로 들어온 데생 몇점. 4년 동안 만나온 주네에게 자코메티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겠노라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말을 내뱉기 어눌해질 정도로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고 느낀 주네는 희곡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듯 “(망설이며)”라는 단어를 넣어 그 놀라운 오후를 기록한다. 그리고 “마치 걷고 있는 듯한 그림은 나를 만나기 위해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향한 그 발걸음을 영원히 계속할 것만 같았다”고, 그날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문장을 적는다.
주네는 어젯밤 막 그린, 이제 막 세상으로 튕겨나온 자코메티의 데생을 보았던 오후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모든 주어는 현재진행형으로 눈앞을 스쳐간다.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당신들을 만나러 서둘러 다가오고 당신들을 앞질러 가버린다.”(45쪽) “그는 커피를, 나는 술 한잔하러 밖으로 나선다. 알레지아 거리의 선명한 아름다움을 좀 더 잘 새겨두려고 그는 자주 멈춰서곤 한다.”(28쪽) 지금 이 순간 주네의 눈앞에서 자코메티는 쉬지 않고 상을 만들어낸다. 아름다운 붉은색 타일이 깔려 있는 방 안에서 눈앞의 종이가 마치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것인 양 데생에 몰두한다. 책에는 날짜도 시간도 자코메티가 참여한 전시도 제작한 작품 제목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1957년 출간된 이 책에서 주네는 자코메티를 20세기 거장으로 박제화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난 고향과 화가였던 아버지, 1950년대 파리에서 왜 이런 얇디얇은 형태의 인물 조각을 빚어내고 있는지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불 꺼진 극장의 암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주네는 조명을 켜는 대신 끝없이 어둠 속의 진흙을 더듬어가며 자코메티의 생각과 작업 그 사이에 깃든 아름다움의 근원을 본다.
주네가 자코메티의 작업을 부르는 몇몇 문장은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작업.’ ‘눈먼 자들을 위한 조각가.’ 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자코메티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마주하려는 주네의 ‘느낌’이다. 느낌에 의지한 추측은 그가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기에, 또 여러 번 거리를 같이 걷고 이야기를 나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네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듯 가볍고 앙상하게 서 있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가끔 손으로 탐색한다. 자코메티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극한과 친숙함 사이의 ‘왕복’에 있다고 적은 주네는 어떤 날은 자코메티의 즐거움을 잘 알겠노라 확신하다가 다음 단락에서는 둘 사이의 대화를 듬성듬성 기록하며 강물에 손을 넣어 깊이를 가늠하는 방문객의 자세를 취한다.
고독을 사이에 둔 교류
실로 자코메티를 떠올리면 어딘가의 중간지대 또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도망치듯 끝없이 걷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흔치 않게 ‘나’라는 주어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주네는 자코메티의 조각상이 감내하는 고독에 대해 쓴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26쪽) 주네와 자코메티는 이러한 고독을 사이에 두고 어떤 순간 강렬하게 교류한다. 어느 날 자코메티는 주네를 몹시 불편한 부엌 의자에 앉혀놓고 그림을 그린다. “당신 아주 잘생겼군!”이라고 말하더니 두세번 붓질을 더한 후 감탄에 겨워 확신을 덧붙인다. “더도 덜도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말이오. 그렇지 않소?” (57쪽) 자코메티가 주네의 얼굴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초상을 읽는다면, 주네는 자코메티의 얼굴에서 그의 석고 작업을 본다. “그가 웃는다. 그러자 주름진 얼굴의 온갖 살갗도 따라 웃기 시작한다. 아주 묘하게, 이마도 따라 웃고 있다.”(12쪽)
거장을 관찰하는 모델
<작업실의 자코메티> 제임스 로드 지음 / 오귀원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자코메티의 아틀리에>가 장 주네와 자코메티 사이에 흐른 깊은 교감을 원천으로 한다면 <작업실의 자코메티>는 작가가 하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 자체를 생생하게 기록하는 데 집중한 책이다. 자코메티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 9 64년 그의 모델이 된 필자 제임스 로드는 같은 해 9월12일부터 10월1일이라는 18일 동안 작가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다. 자코메티가 감기에 걸렸던 9월25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제임스 로드는 가만히 앉아 세계의 거장을 관찰한다. 그는 작업실이 어두워지는 동안 자코메티가 읽고 있던 책, 작업실의 상태, 그날 작가의 기분과 주변인과 나누는 대화 등을 빼곡하게 적어낸다. 단 하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자코메티는 수천번 지웠다가 다시 그리며 매 순간 절망했다 다시 마음을 추스려 붓을 잡아든다. “난 지금 전투 중입니다. 실전상황이라고요. 어젯밤에 작업을 하지 않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지요.”(1 27쪽) 책의 원제는 <A Giacometti Portrait>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