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을 글로 써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어보라고, 막내 기자 시절에 선배로부터 들었다. 바로 구입해 일독했음은 말할 나위 없겠지만 무엇이 특별한지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발자크의 책을, 아니 세상의 책을, 그보다 인간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고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삶을 담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삶이다. 츠바이크가 말년에 집요하게 붙들고 있으며 퇴고를 거듭하고 끝내 살아서 출간하지 못한 미완의 원고가 바로 이 책이니까(이 책의 작가소개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1942년 ‘자유의사로 삶을 마감하였다’). 비현실적인 전쟁의 처음 몇달 동안 츠바이크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책의 원고를 완성했고,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이 책은 출간되었다.
예술가의 평생을 글로 써내겠다는 야심을 품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의 삶의 초년 어디에서 그 천재성이 반짝이며 최초의 빛을 발하는지 그 누구보다 먼저 찾아내 기록하겠다는 욕심을 품을 수 있다. 혹은, 정신의 가장 어두운 지하실에 불을 훤히 비춰 고통을 확대해 보여주며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세상에 알리고 싶을 수 있다. 츠바이크는 풍자를 섞어, 하지만 비아냥 없는 차분함으로 발자크의 삶을 재구성했다. 발자크는 속물이었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자신을 창녀처럼 이용한 예술가”로 세상에 발을 내딛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난관을 제 손으로 만들어내고서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써낼 수 있는 소설가.
절제라곤 없는 삶
발자크의 위태로운 삶은 학교 시절 이미 시작되었다. 선생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는 애정을 주지 않았다. 성인이 되자 부모는 그에게 돈을 벌 것을 요구했는데, 발자크가 자유롭게 글을 창작하며 살겠다는 선언을 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빨리 접게 만들겠다는 각오로 가장 누추한 방에 못 쓸 가구를 채운 뒤 사교활동이라고는 꿈도 못 꿀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보조하기로 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발자크가 가명으로 대중소설을 쓰자는 제안을 넙죽 받아들인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 무엇보다도. 더이상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글을 썼다. 마침내 낭비할 수 있기 위해서 절약하고, 마침내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일하고 일하고 또 일을 했다. 쉴 새 없이 기쁨도 없이. 그래놓고는 사업 제안을 받아들여 크게 키우고 빚을 졌다. 한때 동전 한푼까지 재며 살던 젊은 절약가는 갑자기 참을성 없고 절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억눌러온 모든 것은 한번에 터져나와, 그에게는 한 남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성적인 능력도 주어졌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능력. “마흔살의 여자는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스무살 여자는 아무 일도 안 한다.” 어머니가 그의 유년기 불행을 주도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어머니를 찾아 그 품에서 만족을 얻어내기로 했다. 발자크의 첫 연인은 그의 부모와 이웃해 살던 아이 아홉의 어머니인 마흔다섯살 여인이었다.
츠바이크는 발자크의 천재성은, 그의 진정한 천재성은 엄밀히 말해 문학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그가 자신의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던 막강한 지역들이 더 있었음을 몇번이고 강조한다. 발자크의 시대는 바야흐로 역동적인 젊은이를 위한 공간이었다. 스물다섯살, 서른살짜리 육군 대령이 나오는 시대였다. 다행히 정치와 경제라는 땅에서는 다른 후보를 선출했지만, 문학이라는 영토의 유권자들은 발자크를 두고 마지막 남은 하나의 지역과 최종 경쟁을 치러야 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렇게나 꿈꾸던, 일평생 찾고자 애쓰던 ‘돈 많은 과부’를 찾아낼 위험성이었다. 츠바이크의 표현에 의하면 “그럴 경우 발자크 속에 숨어 있는 초인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쾌락주의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엄청난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압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명성을 이룬 순간이라 해도, 발자크라는 인간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시민적인 안락을 안겨줄 부유한 과부의 연금을 택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사랑과 권력과 자유를 무한히 갈망하는 이 쾌락주의자를 언제나 다시 노동의 감옥 속으로 되쫓아보냈다.
큰 빚을 진 뒤로는 돈을 아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가 되어(노력해도 갚을 도리가 없는 큰 빚이라면 작은 빚을 더하는 것이 문제될 리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영구기관처럼 지치지 않고 글을 썼고, 그에게 글은 그 제목이 알려진 소설 ‘작품’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사치하기 위해 쓰고, 빚쟁이로부터 피하기 위해 썼다. 글을 쓰기 위해서 집을 사치스럽게 꾸며야 했고, 취재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츠바이크가 ‘암담한 막노동’이라고 부른 것을 얼마나 해야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과잉이었다. 절제라고는 없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자기 손으로 완성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보낼 것’이라고 써놓은 보관용 판본(세 번째 수정판)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의 기본 토대를 이루긴 하지만 수정이 진행 중이었고 마지막 장들은 거친 구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것을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정리했다. 유대인을 향한 나치의 광기를 피해 브라질로 떠난 그가 찍은 마침표가, 발자크라는 위대한 인간희극이다. 불완전하고, 어디론가 위태롭게 쏠려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가.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겠다고 더 큰 불행으로 걸어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간. 언제 고꾸라져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생산성으로 살아남은 발자크를 생의 마지막 날들 동안 글로 옮겨내고 몇번이고 수정하며, 츠바이크는 종말을 닮아 있는 세계대전에 자기 방식대로의 이별을 고했다.
북한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펴냄
슈테판 츠바이크가 소설가이기도 했던 것처럼, 시인 백석의 삶을 담은 <백석 평전>을 쓴 안도현 역시 시인이다. 백석의 문학적 적자 중 하나로 꼽히는 안도현은 백석의 삶과 문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과 달리,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해 해방, 분단, 한국전쟁, 북한에서의 문학적 숙청을 겪은 백석의 삶에서 웃음지을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생동감 넘치는 시어가 어디서 태동했는지, 애틋하고 서글픈 시정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그리고 북한에서의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게 도와준다. 백석 말년의 삶에 대해 이 책을 다 읽고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분단된 나라이며 서로 교류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