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 거리에 인생이 있네
2014-10-16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드라마 <유나의 거리>, ‘진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다

“영화잡지 <씨네21>에서 드라마 촬영장에 오시겠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JTBC 드라마 <유나의 거리> 현장에서 만난 배우들과 스탭들의 이 질문을 <씨네21> 독자들도 품을 법하다. 시청률이 눈에 띄게 높은 것도, 이슈를 몰고 다니는 스타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만 방향을 비틀어 물어본다면, 내놓을 수 있는 답변 하나가 있다. 우리의 질문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유나의 거리>는 이 질문에 응답해줄 믿을 만한 레퍼런스라고 말하고 싶다. <유나의 거리>는 하류 인생에도 들어볼 사연이 있고, 어쩌면 우리 인생의 진실을 그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사려 깊게 보여주는 흔치 않은 드라마다. <서울뚝배기>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 등에서 달동네 인생에 깊은 애정을 보여준 김운경 작가는 이번에도 민감한 촉수로 뒷골목 세계를 촘촘하게 그려내 보이고 있다. 사람 이야기에 진짜 목말랐던 독자들이라면, 이 짧은 만남이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내가 이 집에서 농사일 빼고 다 한다~.” 9월27일 일산 빛마루에 위치한 <유나의 거리> 세트장. 창만 역의 이희준이 국화꽃 화분을 앞에 두고 분갈이 중이다. 슬리퍼에 들어간 흙도 툭툭 털어가며, 추리닝 바지 밑단도 접어올리고 앉은 폼이 화분이 아니라 화단이라도 갈아엎을 기세다. 따지고 보면 창만은 전직 건달이자, 현직 콜라텍 사장 한만복(이문식)이 주인으로 있는 다세대주택의 세입자 중 한명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모두 “창만아, 창만아”를 열창한다. 6개월째 창만이로 살고 있는 이희준도 덩달아 열심이다. “얼굴에 흙 좀 묻힐까요? 아니면 땀 좀?” 웃을 때면 얼굴의 모든 근육을 다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는 이희준을 보고 있자니 다세대주택의 든든한 살림꾼 창만 역으로 제격이지 싶다. “실제로 만나보면 어찌나 섬세한지 모른다”는 임태우 PD의 말, 그대로다.

사실 창만만 빼면 <유나의 거리>의 모든 인물들은 그야말로 막장 인생들이다. 여자주인공 유나(김옥빈)는 소매치기에 전과 3범이고, 그녀의 룸메이트 미선(서유정)은 꽃뱀이다. 만복의 아내 홍 여사(김희정)도 룸살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지금은 뒷방 늙은이 처지가 됐지만 문간방 장 노인(정종준)은 한때 잘나가던 건달 도끼 형님이었다. ‘칠쟁이’ 칠복(김영웅)은 과거에 모셨던 사장의 아내 혜숙(김은수)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다. 옆집에 이들 중 한명이라도 살고 있다면 꽤나 골치겠다 싶을 법한데 이런 사람들이 다세대주택에 떼로 모여 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다세대주택의 누구 하나 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똑똑 두드리고 벌컥. 바로 문 열고 들어간다. ‘피자 좀 드세요~’ 하면서. 서로를 믿는 거다.”(김옥빈)

미워할 수 없는 삼류들이 간직한 저마다의 사연

이 모나고 모자라며 지질하기까지 한 인간 군상은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걸까. “김운경 작가가 워낙 엉뚱한 인물들에 관심이 많으시다. 하류, 삼류 인생이라고 해야 하나? 주변부 인생들,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 애정을 쏟아오셨다.”(임태우 PD) 하긴 <서울의 달>의 제비족, <파랑새는 있다>의 차력사, 밤무대 가수, 사기꾼도 그랬다. 그러나 이 모든 캐릭터들이 김운경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절대 아니리라. ‘노숙인 얘기를 쓸 때는 서울역에 가서 같이 소주 마시며 한 2주 동안 노숙을 했다. 제비족 취재를 위해 영등포의 유명한 춤선생 ‘대머리박’에게 사교춤을 배웠다’(2014년 6월15일 <경향신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운경 작가의 캐릭터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상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예민한 관찰력으로 그려낸 인물들에 대한 감탄은 배우들 입을 떠나지 않는다. “대본 받고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김희정), “만복을 보면 작가님께 내 쪼잔한 속내가 들통난 것 같아 놀랄 때가 있다”(이문식). “혹시 작가 선생님께서 나를 알고 대본을 쓰신 게 아닐까? 그 정도였다. 나도 오랫동안 연극하면서 생활고를 겪었는데 칠복이가 딱 그런 어려움을 대변하는 인물이더라. 바로 옆집에서 문 열고 나올 것 같은.”(김영웅)

김운경 작가가 배우들에게 주문하는 건 딱 하나다. “‘인물을 분석하려 들지 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그게 맞다.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인물이 점점 변해갈 텐데 내가 설정을 심하게 해버리면 안 맞는 거다.”(김옥빈) 임태우 PD도 “요즘 드라마는 대사와 대사 사이에 호흡을 거의 안 준다. 우리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배우의 동선을 최대한 살려간다”고 덧붙인다. 인물 한명 한명에 애정을 갖고 있는 작가인 만큼 그의 드라마는 주인공만을 위해 흘러가지도 않는다. “주•조연이 따로 없이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김영웅)는 게 모든 출연자들이 입 모아 하는 말이다. 단순히 조연배우의 대사 한마디를 더 넣고 안 넣고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이 있다고 조용히 웅변하는 것 같다. “미선은 꽃뱀이긴 한데 얼토당토않게 그려지진 않는다. 현실성이 있다. (가난으로 가족을 잃었기에) 미선이가 왜 돈을 밝힐 수밖에 없었는지,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됐는지가 점차 그려진다. 뻔한 얘기일 수 있는데 난 미선이가 유나한테 ‘가족이 있는 게 제일 부럽다’고 할 때가 기억에 남더라.”(서유정)

같은 공간에서 같은 달을 보는 사람들

<유나의 거리>가 트렌디한 드라마와 다른 점은 남녀주인공의 마음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창만은 유나를 헌신적으로 바라보지만 유나는 늘 한발 떨어져 창만과 거리를 둔다. 한번도 흔쾌히 화답하는 법이 없다. “38부까지 왔는데 아직 유나랑 키스 한번을 안 했다. (웃음) 근데 작가님 성격대로라면 이대로 계속 차분하게 가지 않겠나.”(이희준)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도 극도로 자제한다. “창만과 다영(신소율)이 잉그리드 버드먼 얘기를 하는 걸 유나가 우연히 듣게 된다. 유나는 그러면서 ‘왜 나는 잉그리드 버드먼을 모르지?’라고 생각한다. 유나와 창만이 좀 가까워졌나 싶을 때 필요한 유나의 질투를 이런 식으로 슬쩍 보여주시는 거다. 딱 그만큼.”(이희준) 맹렬한 열정보다는 군불에 은근히 달군 연정에 가깝다. 그래서 누군가는 극이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옛날 드라마 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맹점이 <유나의 거리>만의 매력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감정 과잉 없이 그걸 또 노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물론 연출자로서 임태우 PD의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김운경 작가와 <짝패> 때도 같이했다. 당시에도 주변 인물들을 그리는 능력은 탁월하셨다. 그러나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가면서 이야기를 주인공 쪽으로 몰아가지 못했다. ‘주인공이 어떤 결말을 맺는가.’ 나는 한 드라마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유나의 거리>의 문제의식이 보여지느냐 아니냐는 유나와 창만의 관계가 얼마나 더 진전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내가 작가님을 괴롭히고 있다. 힘닿는 데까지 주인공들로 이야기를 좀더 밀어붙여볼 생각이다. 뭐, 선생님은 피식피식 웃으시며 또 딴 얘기를 하시겠지만. (웃음)”(임태우 PD) 작가를 향한 신뢰를 기본으로 <유나의 거리>만의 매력에 조금 더 힘을 보태려는 그의 노력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유나의 거리> 속 인물들은 서로에 의해 조금씩 변해왔다. “20여년 만에 나타나 가족이라고 하는 것보다 하늘 아래 같은 공간에서 같이 달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추억도, 공감할 정서도 생기지 않겠나. 어쨌든 사람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사랑이 있어야 하니까.”(김희정) 막다른 길에 섰던 인물들은 이제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계절은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됐고 50부작이라는 대장정은 이제 종반을 향해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어느 거리에서, 시장에서 마주칠 것 같은 이 사람들의 안부가 오랫동안 궁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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