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SF영화의 ‘신의 손’
2014-11-27
글 : 윤성철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과학자에게 <인터스텔라>에 대해 묻다1: 블랙홀 옆 행성에서 살 수 있나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의 물리학자 킵 손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블랙홀 외형의 모습은, 언론이 소개한 바대로 꽤나 사실적이다. 주인공은 그 블랙홀 옆의 행성이 과연 지구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그곳은 블랙홀과 아주 가까워서 강한 중력의 영향 아래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장이 강할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1시간을 하릴없이 낭비하고 그동안 지구에서는 무려 7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어느덧 임종을 앞둔 백살 넘은 노인이 되어 손자같이 젊어 보이는 아빠와 재회한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는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시간 지연 효과를 이렇게 감정이 북받치도록 실감나게 느끼게 해준 영화가 또 있었을까? ‘블랙홀에 근접한 행성’이라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매우 멋진 영화적 성취다.

이렇게 영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블랙홀에 근접하여 공전하는 지구형 행성’이라는 설정은, 아쉽게도 과학적으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일 수밖에 없다. 블랙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얼마든지 행성이 자유롭게 공전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와 같이 시간 지연이 크게 발생하는 사건 지평선 근처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강한 조석력의 영향으로 그 행성은 이미 뜨거운 용암 덩어리가 되어 찢겨져 나갔어야 했다. 더군다나 그런 엄한 곳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재래식 연료 우주선이라니!

이런저런 SF영화가 나올 때마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그거 아니거든!’이라고 한마디씩 하는 이유는 과학의 권위를 앞세워 영화적 상상력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만큼 영화적 상상력과 과학적 상상력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과학의 잣대로 SF영화를 볼 때에는 마라도나가 1986년 월드컵 결승에서 첫골을 넣는 장면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라도나가 천재라고 불린 이유는 발로 축구를 하면서도 발로 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신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마라도나는 손으로 골을 넣었다. 멋진 승부를 기대했던 축구 팬의 입장에서는 김빠지는 일이다. 마라도나는 ‘신의 손’이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손을 쓸 수도 있지 왜 그의 축구적 상상력을 시답잖은 규칙을 앞세워 억압하고 그래요?’라고 그를 위해 변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손을 이용한 반칙은 상상력이 아닌, 꼼수일 뿐이다. 축구적 상상력에 따른 전략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머리와 발만 이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이제까지 신의 손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을 구현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통해 자연법칙이라는 매우 엄밀한 제한 조건을 우직하게 준수하면서 성취한 것이고, 그것이 과학적 상상력이 위대한 이유이다. 드라마적인 감동을 위해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손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는 순간, 과학자들은 논문 조작이라는 한심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인터스텔라>는 과학 다큐가 아니고 판타지다. 영화적 상상력의 구현은 논리나 실험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펑펑 눈물을 흘렸으니 충분히 설득당한 셈이다. 정작 <인터스텔라>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점이 있다면 스토리 전개를 위해 남발되는 과학적인 반칙이 아니라 영화가 담고 있는 과학을 향한 태도이다. 천재 과학자 한명이 양자중력 방정식 하나를 뚝딱 풀어내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어리석은 질문에 누구도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 속 사람들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사랑’이라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과학이 마술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듯하다.

책 속에 정답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다>

최근 천문학계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닌 외계 행성을 찾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지구에서처럼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지구형 행성이 우리 은하에 100억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다>(제프리 베넷 지음, 이강환•권채순 옮김, 현암사 펴냄)는 외계 생명체와 외계 행성계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연구 결과 및 장래 전망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독자들은 왜 블랙홀 주변에는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할 수 없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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