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주성치 비긴 어게인
2015-02-05
글 : 송경원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주성치 필모그래피 어디쯤 와 있나
<서유기: 모험의 시작>

1994년 <서유쌍기>는 주성치 영화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주성치가 20년 만에 다시 <서유기>를 들고 찾아왔다. 이번엔 주연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말이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2013년 중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우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쿵푸허슬> 이후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가 싶더니 주성치 특유의 가벼움과 뻔뻔함,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88년 <벽력선봉>으로 웃음의 신세기를 연 지 어언 28년. 주성치에게도, 우리에게도 특별한 <서유기>를 통해 주성치의 영화 세계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해봤다. 자신의 영화엔 언제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배우 주성치와 감독 주성치를 비교해보기에 이만큼 적합한 기회도 없을 것이다. 키워드로 읽는 주성치 영화 명장면도 더한다. <서유기>, 모험의 아니 주성치의 시작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소홀하기 쉽다. 익숙해지다보면 적당한 이름 하나 붙이고 의식의 저편으로 미뤄둔 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때 주성치는 우리에게 불가해한 대상이었다. 그가 몸으로 직접 시연하는 슬로모션의 생쇼를 보는 순간, 우리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환호하거나 거부하거나. 중간은 없었다. 주성치의 웃음은 보편적인 영화언어로 판독할 수 없는 독창성, 난해하다면 난해하다고 부를 수 있는 개그 센스 속에서 꽃피워왔다. 평론가의 언어보다 마니아의 환호 속에 자라온 것이다. 그렇게 주성치 영화는 분석과 관찰의 대상이 되는 대신 팬들의 환호 속에 어떤 믿음으로 거듭났다. 주성치에 입문한 이들만이 영접할 수 있는 일탈 코드는 주변의 비웃음과 박해가 거세질수록 강해졌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하지만 어느 순간, 정확히는 <소림축구>를 기점으로 주성치는 주류영화에 편입한다. 물론 자신의 스타일을 벗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폭이 넓어졌다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신> <희극지왕>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후죽순 쏟아지던 패러디를 뒤로한 채 점차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보였고,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주성치의 영화미학은 조금씩 영역을 넓혀갔다. 이윽고 등장한 <소림축구>는 아직 포섭되지 않은 관객까지 주성치교에 입문시킬 결정적 한방이었다.

오랜 박해를 뒤로한 채 끝내 주성치 월드가 집대성되는 감동의 순간.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많은 이들이 이미 주성치를 안다고 생각한다. ‘주성치는 이렇다’고 몇 가지 단어로 결정짓고 더이상 그를 새롭게 발굴하려 하지 않는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보며 낄낄대고, 소나기처럼 날린 웃음의 잔주먹 하나 놓치지 않던 정성은 이제 없다. 편하고 안락하게 주성치스러움을 즐기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속단해버린다. 주성치가 이미 철지난 장르로 취급받기까지 <소림축구> <쿵푸 허슬>, 단 2편이면 족했다. 과연 그런가. 덩치를 키운 주성치는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진 오래된 장르인가. 주성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나.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그에 대한 주성치의 화답이다. 주성치는 아직도 멀고 먼 천축행 어딘가를 걷고 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최고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주성치의 최고작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장담컨대 전부 다른 영화를 말할 것이다. <녹정기>? <식신>? <파괴지왕>도 좋은데. 이걸 어떻게 고르나. 주성치 영화의 핵심은 어쩌면 그 불균질함에 있다. 빼어난 걸작과 여러 범작이 아니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제각각의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유쌍기>(<서유기: 월광보합> <서유기: 선리기연>) 2편을 뽑았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닳고 닳은 <서유기>를 주성치식으로 재조합한 <서유기>에는 멜로드라마, 코믹, 액션, 아날로그 특수효과뿐 아니라 무려 시간에 대한 사유도 함께 제시된다. 말하자면 <소림축구> 이전에 <서유기>가 있었다. 주성치가 다시금 <서유기>를 꺼내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CG를 기반으로 한 주류 감성을 첨가하기 전 주성치 월드의 중간정리라 할 수 있는 <서유기>를 어떻게 다시 만지느냐. 여기서 주성치의 현재가 어디쯤인지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서유기>라는 같은 원작을 2차례나, 한번은 주연으로 출연하고 한번은 감독으로 연출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당연히 어떻게 다르게 각색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대개 각색 과정에서 범하는 실수는 여기서부터다. 차별화에 대한 강박이 유지해야 할 요소들의 배치마저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우마왕의 반전에 매달리다 결국 CG로 구멍을 메우려 했던 <몽키킹: 손오공의 탄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서유쌍기>는 지존보, 반사대선, 춘삼십랑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새로 추가하며 왁자지껄하게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돋보였던 건 캐릭터에 관한 재해석이었다. 이는 <서유기: 모험의 시작>에서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에 관한 전사(前史)다. 우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삼장법사와 함께 천축으로 떠날 것임을 알고 있다. 영화는 각 캐릭터가 함께 모이기 전 각자의 사연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서유쌍기>가 손오공에 관한 전사였다면,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삼장법사, 사오정, 저팔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주성치의 상상력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서유기: 모험의 시작>의 캐릭터 해석은 의외로 원작에 충실하다. 사오정이 강 요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사연, 저팔계가 요괴로 전락해 사람을 잡아먹게 된 사연을 충실히 재현한다. 한데 표현 방식이 이색적이다. 가벼움을 신조로 하는 주성치 영화에서 이토록 기괴하고 무섭게 그린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사오정과 저팔계의 묘사는 거의 호러영화에 가까운데 이 평범하지 않는 디자인이 무난한 사연과 붙는 순간 기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주성치를 읽어나가는 코드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불협화음과 엇박자를 빼놓을 순 없다. 그는 희극적인 사람이라기보다 주변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자신을 끼워넣어 희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는 쪽에 가깝다. ‘형은 진지한데 그럴수록 희극적인’, 이른바 상황의 코미디다. 바로 그 불협화음이 누군가에게는 썰렁함, 누군가에는 어색함, 누군가에게는 참기 힘든 오글거림, 누군가에는 중독성 있는 웃음의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에서도 소나기 같은 잔펀치는 무수히 쏟아진다. 사오정이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을 때 벌어지는 슬립스틱 개그들. 시소 한쪽 끝에 걸린 사오정을 잡기 위해 기꺼이 용기를 낸 마을 사람들이 애크러배틱 점프를 해대며 떨어지는 장면. 가짜 퇴마사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굳이 그의 젖꼭지를 붙잡고 늘어지는 추잡함.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사오정의 뜬금없는 왜소하고 고운 자태의 민망함. 착해빠지고 심심한 사연일지라도 이질적인 요소를 첨가하거나 비트는 그의 전매특허 연출을 거치면 풍성해진다. 아무리 평범한 이야기도 입체적으로 부풀려주는 마법의 주문,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오를지 모를 난센스의 감각, 이른바 ‘모레이타우’(無厘頭)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코미디적 상황을 위한 장치였던 모레이타우가 연출 전반으로 확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익숙한 서사 더하기 기괴한 캐릭터, 순박한 메시지 더하기 현란한 전개, 말초적인 웃음 더하기 가슴 찡한 눈물. 결국 <서유기>에서 멀어질수록 원작 <서유기>에 더 가까워진, 이상하고 아름다운 요괴대백과 같은 영화가 탄생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이제껏 나온 어떤 <서유기> 영화보다 원작에 충실한 동시에 어떤 창의적인 재해석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가진 거라곤 사람을 믿는 재주밖에 없는 진현장(문장). 그는 어떻게 봐도 믿음이 가지 않는 사부의 말만 믿고 동요 300수로 요괴를 교화시키려 한다. “우린 모두 아기처럼 순수하단다”라는 제멋대로 각색한 대사로 요괴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주성치 영화는 언제나 대책 없는 순박함과 무한 긍정을 전제로 한다. <희극지왕>에서 성공을 코앞에 둔 주성치에게 장백지가 “날 평생 먹여살릴 건가요”라고 물었을 때 너무도 당연하단 듯이 “그래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감동한다.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판타지, 하지만 지키고 싶었던 당연함이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웃기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주는 그 한마디에 주성치 세계의 진수가 묻어 있다. 웃기지만 진지하고 진지하지만 실소를 자아내는 광대의 정극. 동요 300수에는 이러한 아이 같은 마음이 담겨 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순박함.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잠자고 있는 영웅의 면모. 어쩌면 주성치 영화 최상의 판타지는 거기에 있다. 요괴의 악한 본성을 걷어내고 착한 본성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믿음은 원작 <서유기>와 주성치 월드를 이어주는 단 하나의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무한긍정과 순박한 영웅들의 세계

동요 300수는 중구난방 뻗어나가려는 주성치 월드를 영화라는 형태로 유지해주는 비급이다. 단지 평범한 이들의 선량함을 상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이 한권의 책을 중심으로 그간 주성치 영화의 각종 요소들을 끌어당긴다. 동요 300수를 부르는 노랫가락은 <서유쌍기>의 O.S.T <일상소애>(一生所愛)다. 그 애잔한 가락은 <서유쌍기> 엔딩에서 괴로워하던 손오공, 아니 주성치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현장의 사랑인 퇴마사 단소서(서기)가 달빛 아래 <일상소애>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에서 <서유쌍기>의 자하(주인)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동요 300수를 듣고 괴로워하는 사오정의 모습은 또 어떤가. <서유쌍기>에서 <Only You>를 열창하며 손오공을 괴롭히던 삼장법사와 판박이다. 주인공은 진지한데 나머지는 민망해하는, 어색한 상황에 내던져진 관객은 이제 <서유기>와 주성치의 필모그래피를 비교해가며 웃음 코드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같은 장면을 기억 속에서 꺼내 보고 또 보는, 한동안 잊었던 신심(信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말이다.

그 밖에 퇴마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주성치의 사극영화 속에 빈번히 등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특히 공허 공자와 말다툼을 벌이는 할머니 시녀들에게서 <007 북경특급2>의 추녀 군단의 그림자를 발견할 땐 웃겨서 눈물이 나는지 그리워서 눈물이 나는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무공비급 같은 동요 300수의 존재, 돼지촌을 닮은 수상가옥 등 <쿵푸허슬>의 설정들도 곳곳에 박혀 있다. 흔히 주성치 영화를 초기작, 현대물, 패러디물, 시대물 등으로 구분하곤 하지만 이는 편의상 따른 분류일 뿐 그는 항상 ‘지금 현재ʼ에 시도할 수 있는 최상의 ‘주성치’ 영화를 만들어왔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역시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익숙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해오고 변주하는 등 스스로를 패러디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만 이 패러디와 변주는 다시금 사용될 때마다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점층적인 의미를 쌓아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래서 반복과 패러디가 분명함에도 마치 확장처럼 보인다. 그는 <소림축구> <쿵푸허슬> 등에서 학습한 대중적인 감각과 호흡을 유지하는 가운데 자신이 해왔고 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녹여냈다. 뼈대는 안전하고 대중적인 동화, 장식은 주성치스럽게 꾸민, 잘빠진 기성품이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모두들 주성치를 안다고 말한다. 빤하다고 말한다. 모레이타우 영화는 대충 이런식으로 전개될 것이라 상상한다. 하지만 주성치의 모레이타우는 언제나 당신의 허를 찌른다. 사실 장르 구별은 주성치 영화 앞에서 무의미하다. 주성치는 이번에도 모두 다 아는 <서유기>, 익숙한 장면들, 늘 해왔던 웃음코드를 버무려 또 하나의 주성치 영화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거기서 향수를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익숙함을, 누군가는 반전을 발견할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현재를 영화에 반영하여 최상의 결과에 도달해왔고 3편의 <서유기>로 미뤄 짐작건대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3부작으로 기획된 영화다. 아직 2편 남았다. 영화의 천국을 향한 주성치의 천축행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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