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혁 1983
특수효과(VFX) / 디지털 아이디어 소속으로 <고지전>(2011), <타워>(2012), <루팡 3세>(2013), <순수의 시대>(2014), <장수상회>(2015), <조선마술사>(2015)에 참여했다.
1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군 제대 후 영상 제작에 빠져 매일 찍고 편집하고 CG 작업을 하는 게 일이었다. 마침 학교에 ‘디지털 아이디어’의 손승현 본부장님이 강연을 오셨는데, ‘이거다’ 싶더라.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무작정 찾아뵀고 운 좋게도 취업이 됐다. 처음에는 2D 아티스트로 작업을 하다가, <고지전>으로 현장 슈퍼바이저가 됐다. 프리 단계부터 후반 공정까지 전부 관여한다. 시나리오를 분석해 촬영이 가능한 부분과 VFX로 처리해야 할 장면을 정리하고, 촬영장에 가서 어떻게 찍어야 후반 공정이 수월해지는지를 현장 스탭들과 조율한다. 촬영분을 VFX 작업자들에게 전달해 확인하고 완성본을 만드는 게 내 일이다.
2 고생하며 참여한 <타워>로 대종상 영상기술상(손승현)을 받았을 때 정말 좋았다.
3 규모가 좀 되는 할리우드급 영화를 꼭 해보고 싶은데, 아직 멀었다.
4 계획대로 촬영이 어려울 때,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 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내 말 한마디에 현장 세팅이 다 바뀌니 빠르고 정확한 판단은 필수다.
5 처음에는 다른 영상 업무에 비해 수입이 적지만 연차가 쌓이고 인정받으면 보상이 확실하다. 철저한 능력제다.
6 열정 페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적절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정혜리 1988
D.I.(Digital Intermediate) 컬러리스트 / 사진예술 전공. <조금만 더 가까이>(2010), <건축학개론>(2012), <숨바꼭질> (2013), <무명인>(2014), <신의 한 수>(2014), <군도: 민란의 시대>(2014), <소셜포비아> (2015), 올해 개봉할 <암살> 등에 참여했다.
1 홍대 KT&G 상상마당의 마스터링 테크니션 김형희 실장의 추천으로 상상마당 영화사업부 D.I.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됐다. 2013년부터 씨네메이트 소속의 컬러리스트로 일한다.
2 갈 길이 멀어서일까. 아직 ‘최고’의 성취감을 맛보진 못했다. 그나마 전공이 사진이고 이후 색 공부를 하게 돼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3 성격상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면 벌써 그만뒀다. 이 일이 정말 재밌다.
4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얻는다. 최근 5년 만에 다시 암실에 나가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생활의 활력이다.
5 부모님과 함께 살며 생활비 걱정을 덜어서인지 수입은 적당한 것 같다. 인센티브도 있는데 전 직원이 똑같이 나눈다.
6 부가판권 시장에서 영화가 방영될 때, 제작사가 비용 절감 차원으로 색 보정을 원래 작업했던 팀이 아닌 다른 업체에 맡긴다. 마스터링을 단순 컨버팅으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윤희선 1985
분장 / <그랑프리>(2010),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카운트다운>(2011), <인간중독>(2014)의 분장팀으로 일했고 <시간이탈자>(2015)에 분장팀장으로 합류했다. 프리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1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호주에서 2년간 헤어 공부를 했다. 한국에 돌아와 1년간 분장도 배웠다. <그랑프리>에 등장하는 말의 모형을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현장 분장팀에 합류했다.
2 처음 일 시작했을 때, 너무 긴장을 해서 간단한 드라이 정도도 못해 배우의 기분을 상하게 한 적이 있었다. 며칠 밤에 걸쳐 연습을 하고 다시 했더니 그 배우가 ‘늘었다’고 한마디를 해주시더라. ‘한 고비 넘겼구나’ 싶었다.
3 분장이 다른 파트에 비해 덜 중요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맥이 풀린다.
4 사람을 좋아해서 현장의 모든 스탭들과 두루 허물 없이 지낸다. 그 덕을 보는 것 같다.
5 분장팀은 프리 프로덕션 때 돈을 받지 않은 채 진행부터 할 때가 많다. 크랭크인 일정이 연기라도 되면 주머니 사정이 진짜 어렵다. 틈틈이 뮤직비디오, 화보 촬영 일을 하는 것도 그래서다.
6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영화 현장을 떠나는 친구들이 많다. 선배들은 ‘조금만 버티면 좋아진다’고 하는데 언제까지 모든 걸 감수하고 열정만으로 버틸 수 있을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돼야 한다.
김선미 1989
마케팅 / 영화 홍보, 마케팅 회사 퍼스트룩에서 근무. <완득이>(2011)를 시작으로 <도둑들>(2012),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감시자들>(2013), <명량>(2014), <장수상회>(2015) 등의 홍보 마케팅을 진행했다.
1 서울예대 방송영상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영화 일을 하고 싶었다. 졸업 즈음 퍼스트룩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5년째 일하고 있다.
2 시사 후 관객 멘트나 반응이 좋으면 연출자가 아닌데도 기쁘다. 동생이 학교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단체관람하고, ‘우리 누나가 마케팅했다’고 하니 친구들이 놀랐다고 하더라. 그때 내 일이 누군가에게 자랑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매 순간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감독, 배우, 제작사, 기자들 모두 원하는 게 다른데 그 사이에서 조율을 해야 한다.
4 영화 하나에만 빠지지 않는다! 시간이 나면 영화를 잊고 다른 것들을 흡수하려고 한다.
5 처음엔 좀 적다 싶기도 하지만, 연차가 반영되는 일이다 보니 적정선의 임금이지 싶다.
6 마케팅 업무는 점차 다양해지고 일량도 많아 이직이 잦은 편이다. 좀더 안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전문 인력이 많이 배출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민혁 1982
소품 / <기담>(2007), <추격자>(2008), <7광구>(2011), <마이웨이>(2011), <감기>(2013), <군도: 민란의 시대>(2014), 곧 개봉할 <곡성> 등에 참여했다. 현재 소품 전문 업체인 드림아트센터의 소품팀장으로 있다.
1 제작부에서 일하다가 생활고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소품 일을 병행했다. 막상 해보니 정해진 예산 안에서 근사치의 소품을 준비해내는 재미가 컸다. <7광구> 때부터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2 나홍진 감독님의 <곡성>을 마쳤을 때다. 감독님이 워낙 꼼꼼하셔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소품들도 다 잡아내셨다.
3 불합리한 계약 조항에 분개해 실제로 그만둔 적이 있다. 의상, 분장팀처럼 소품팀도 감독 개념의 (팀)장이 없어서 그런지 현장에서 기술팀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때가 많다.
4 마흔살 이후 여행 다니고 스포츠 활동을 하며 삶을 즐기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며 참을 뿐이다.
5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3개월간 150만원 정도를 받았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정당하게 제때 받는 게 중요하다.
6 영화 일을 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임금 개선이 시급하다.
정요한 1981
촬영 /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졸업. 3D 프로덕션 투아이디지탈 4년 근무. <그녀들의 방>(2008), <알파센타우리>(2010) 등 촬영.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상업영화 촬영팀 합류. 현재 정정훈 촬영감독의 서드로 <아가씨> 크랭크인을 준비 중이다.
1 고등학생 때 비디오로 본 <시네마 천국>과 EBS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한 <시네마 천국>의 결말이 달랐다. ‘디렉터스 컷’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편집을 하길 희망했었는데 학교에서 단편 작업을 하며 촬영을 맡게 됐다.
2 장편 상업영화 첫 작품인 <행복이 가득한 집>이 크랭크업했을 때. 잘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열악한 현장에서 일할 때. 또는 촬영감독, 촬영부 퍼스트, 촬영부 세컨드의 말이 서로 다른데 그 사이를 조율해야 할 때.
4 세컨드 말을 잘 듣는 것. (웃음)
5 팀마다 다르고 예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서드로 1년에 두 작품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1천만원 내외? 그나마도 나는 다른 데서 촬영했던 경력을 인정해줘서 높게 책정받았다. 작품을 할 때 돈을 얼마나 받느냐보다 작품에 들어가지 않을 때의 공백이 더 불안하고 생활에 영향이 크다.
6 영화쪽 사례가 아니었고 광고 일을 하며 느낀 건데 어린이를 데리고 촬영할 땐 그 애들의 촬영 시간은 철저히 지켜주어야 할 것 같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장유빈 1985
연출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영화과 연출전공 재학 중. 단편 <Let’s Take a Walk>(2009), <초아일기>(2013), <비상구>(2014)를 연출했다.
1 어릴 때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무언가 창작하는 걸 좋아했다.
2 <초아일기>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스탭들과 고생해서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컸다.
3 딱히 없다. 다만 영화를 제작할 때 영화 외적인 것들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있다. 촬영장소가 펑크나거나 날씨로 인해 무기한 촬영을 중단해야 하거나. 가끔 부모님의 기대나 경제적인 문제와 부딪힐 때도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영화 찍어야 하나 싶다.
4 이곳저곳을 무모하게 돌아다니며 시나리오 아이템을 찾는다. 특이한 장소에 가면 특이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5 아직은 학생 신분이라 고정수입은 없다. 방학 때 뮤직비디오 촬영이나 현장에서 단기 아르바이트 하면서 번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
6 스크린 독과점 문제. 점점 다양한 영화가 아닌 한 가지 영화만을 보게끔 관람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또 대기업의 시나리오 투자 심사 과정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에선 결코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제작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고, 작은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더 넓어졌으면 한다.
박두희 1989
제작, 단편영화 배급, 영화잡지 발행 / <용서는 없다>(2009) 미술팀, CGV왕십리 영사기사 보조, <써니>(2011) 제작팀, 영화 <1985 2063> <마침내 나> 연출, 필라멘트픽쳐스와 CJ E&M ‘버터플라이프로젝트’의 기획 및 투자팀, 영화사 달리기 설립 후 단편영화 배급, 비정기간행 영화잡지 <아노>의 발행인까지 영화계를 전방위로 경험했으며 현재는 <만일의 세계>(감독 임대형, 2014)로 장편영화 제작을 준비 중이다.
1 내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영화는 워킹 타이틀의 영화다.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2 나의 첫 연출작 <1985 2063>의 최종본이 나왔을 때. 하지만 공개하지 않아 아무도 모른다. (웃음)
3 군대에서 허리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다. 현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굉장히 불안했다.
4 그냥 부딪치기.
5 영화사 달리기 수익은 제로다. <아노>도 후원금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만들었고, 3호는 유가지였지만 회수된 금액은 사실상 없다. 그 돌파구로 제작을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가끔씩 촬영 지원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생각하면 월수입은 최대 100만원쯤?
6 열린 마음.
모소라 1985
미술 / <요가학원>(2009)부터 이하준 미술감독팀에서 일했다. <하녀>(2010), <육혈포 강도단>(2010), <푸른소금>(2011), <도둑들>(2012), <관상>(2013), <해무>(2014) 미술팀. <또 하나의 약속>(2013)에선 세트감리. 곧 개봉할 <뷰티 인사이드>로 팀장을 달았다.
1 ‘러브하우스 세대’라고 아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러브하우스>(2001)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일하는 남궁선 인테리어디자이너의 멋진 모습을 로망으로 삼고 꿈을 키운 내 또래 실내디자인 전공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웃음) 공연 무대나 드라마 세트쪽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젠틀한 이하준 미술감독님 밑에 있다보니 다른 일 할 생각은 아예 없어졌다.
2 기술시사할 때. 영화가 잘 나오든 못 나오든 상관없다. 우리의 기록이니까.
3 감독이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걸 요구해서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 내가 어떤 소품이 필요할 거라고 말할 땐 안 듣다가 나중에 도로 가져오라고 할 때.
4 나중에 혼자 무릎치면서 화낸다. (웃음) 농담이고, 체력 관리가 최우선이다. 각종 영양제 정보를 팀원들끼리 공유한다. 요즘은 면역력을 키워준다는 프로폴리스를 먹고 있다.
5 (한참 고민 후)…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면 되나? (웃음)
6 표준근로계약서가 잘 지켜지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현장의 실상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쪽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체 현장의 분업화가 절실하다. 일당백을 하려니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모두 스트레스받는 것 같다.
장주은 1987
특수분장 / <나의 독재자>(2014), <빅매치>(2014), <성난 변호사>(개봉 준비 중)에 참여. 송종희 분장감독의 회사 미모스에서 2년가량 일했다.
1 조소를 전공했고, 대학 땐 미술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그러다 아이들을 잘 가르칠 자신도 없고 길도 좁아 선생님이 되려던 마음을 접고, 예전부터 관심 있던 특수분장쪽으로 눈을 돌렸다. 특수분장학원을 1년 다닌 뒤 일을 시작했다. 어릴 적 엄마와 외할머니와 함께 액션영화를 자주 봤던 게 특수분장에 관심을 갖는 데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2 힘들게 한 작업이 좋은 결과물로 나왔을 때. <나의 독재자>가 기억에 남는데, 룩(look)이 자연스럽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뿌듯했다.
3 아직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몸이 아픈데도 계속 일해야 될 땐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요즘도 등이 아파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4 특수분장쪽에 미술 전공자들이 별로 없는데, 미술을 전공한 게 큰 힘이 된다. 스컬팅(sculpting, 석고로 본을 뜨고 형체를 만드는 작업)이나 재료의 특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배우는 것 같다.
5 회사 들어가서 첫해 월급이 100만~200만원이었다. 작품 들어가면 인센티브를 따로 받아 큰 걱정은 없는 편이다.
6 영화계의 문제점을 얘기할 만큼 경험이 많지 않다. 운이 좋아서인지 돈을 못 받은 적도 없고 힘든 일을 겪었던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