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그의 육체가 스크린 안으로 들어갔다
2015-05-20
글 : 박인호 (영화평론가)
버스터 키튼 탄생 120주년 특별전, 6월3일까지 부산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서
<카메라맨>

나에게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자를 수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떠돌이 찰리의 중산모, 버스터 키튼의 납작한 팬케이크 모자, 자크 타티의 벙거지 모자를 고를 것이다. 1920년대 슬랩스틱 코미디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물건을 떠올리면 찰리 채플린의 지팡이, 해럴드 로이드의 동그란 뿔테안경이 떠오른다. 버스터 키튼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그와 한몸을 이룬 것처럼 세상을 누비고 돌아다니는 기차, 자동차, 배와 보트, 자전거와 같은 운송수단이 생각나는데 이 기계들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너무 거창하다. 키튼의 영화와 그의 세계를 떠올리면서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나에게 키튼의 소지품 중 하나를 고를 행운이 따른다면 주저하지 않고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의 앙상한 우산을 선택할 것이라고. 세상의 악재와 고난과 대결했던 키튼의 세계에서 무시무시한 태풍과 맞서던 이 볼품없이 너덜거리는 우산은 가장 숭고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에게서 훔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영화 사상 가장 슬픈 표정을 지니고 있다. 놀랍거나 화가 날 때, 당황할 때나 기쁠 때에도 그는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일까봐 통제하는 것 같은 머뭇거림을 보여준다. 이 찰나적인 표정은 그의 영화가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뒤섞인 우아함, 더이상의 고난이 온들 대수롭겠냐는 듯한 관조와 체념, 세상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얼굴이 어떤 표정보다 아름답고 감정을 층층이 숨겨놓은 그의 눈동자에 비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웃거나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거나 체념하는 표정을 버리는 대신 관객에게 내어준 것은 그의 경이로운 육체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다. 키튼이 어릴 때부터 연마해온 애크러배틱한 능력은 높은 건물, 달리는 기차, 완공되지 않는 교량 정도는 가볍게 통과한다. 자동차의 질주와 기차의 횡단, 몰려드는 암소 무리나 바윗덩어리의 낙하, 물이 차오르는 배에서 그가 보여준 스턴트는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초 거대한 모더니티의 산물들은 키튼의 육체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터가 되었다. 건설 중인 다리와 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뛰고 인간 도르래가 되어 거대한 선박의 갑판과 선실을 자유롭게 오간다. 아파트 1층에 놓인 전화를 받기 위해 계단을 내달리는 그의 몸은 중력을 거스르는 상승과 낙하의 바퀴처럼 움직인다. 기계처럼 정밀한 움직임은 정확한 타이밍을 계산한 그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자 무표정에 숨긴 감정을 변형시킨 형태가 된다.

<셜록 주니어>

키튼은 그가 당면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질주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쓸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고난을 돌파하기란 쉽지 않다. 집을 지으면 폭삭 주저앉고 좋아하는 여성과 데이트를 하면 큰 비가 내린다. 결혼하고 싶지만 여자쪽 가족들이 반대하다 못해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닌다. 가장 슬픈 사실은 그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그를 오해할 때 일어난다. 그는 용감함, 정직함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그가 무능력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도시를 누비기도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난처함이다. 키튼이 부호의 아들이거나 상속자로 등장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그는 대부분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노동자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가 열심히 일할수록 주변은 엉망이 되고 그곳을 유지하는 질서는 파괴된다. 자동차들이 멈춰서고 기차는 선로에서 이탈한다. 암소들이 대로를 점령하고 길을 닦던 사람들은 먼지를 뒤집어쓴다. 이런 상황을 집대성한 장면들은 집을 둘러싼 소동에서 잘 드러난다. <일주일>(1920), <유령 들린 집>(1921), <이웃>(1921), <하이 사인>(1921), <내 아내의 인간관계>(1922), <일렉트릭 하우스>(1922)는 집의 구조를 이용한 스턴트가 기적 같은 움직임을 만들기도 하지만 집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가 파괴로 이어지거나 집 때문에 이웃과 다투는 과정을 통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드러낸다. 복닥거리는 아파트 구조는 공생하는 그들의 삶을 어지럽히는 원인을 제공하고 때로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리지만 집은 모두에게 소중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벌어지는 혼돈의 격돌조차 온정을 지니고 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

영화와 같은 해에 세상에 태어난 키튼은 기차를 사랑했고 영화에 매료되었다. 특히 움직임을 지속시키는 카메라는 그 어떤 장치보다 그의 육체를 담아내기에 좋은 기계였다. <셜록 주니어>(1924)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메라맨>(1928)은 영화-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주목한 영화다. 탐정이 되고 싶은 영사기사는 필름을 틀어놓은 채 잠이 든다. 유령처럼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키튼은 극장으로 내려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반투명한 육체는 스크린에 투사되어 영화를 체험하고 극장 밖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의 잠은 꿈이 되고, 꿈은 영화로 불려나오는 순간 마술이 발생한다. 그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이 되고 현실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해결의 순간 사랑하는 여인이 찾아온다. 잠에서 깬 그의 눈에 비치는 영화와 똑같은 상황에 놓인 키튼은 영화 속 인물이 하는 행동(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수줍게 키스한다)을 모방한다. 영사실의 작은 창은 스크린과 마주하는 또 다른 스크린이 되고, 영화와 현실이 마주하는 이 장면은 이후 만들어질 영화에 대한 무수한 주석들보다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카메라맨>은 뉴스릴을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기계-키튼의 육체을 일체화시킨다. 중국인 갱단이 총격전을 벌일 때 키튼은 총의 방향에 따라 카메라를 움직이고 심지어 삼각대를 손에 들어 총처럼 위장한다. 키튼의 육체와 합체된 영화-기계와 총은 대결은 이 영화의 압도적인 장면이다. <셜록 주니어>가 영화를 둘러싼 환경(잠과 꿈, 극장과 영사실, 영화와 현실)을 제시한다면 <카메라맨>은 대상을 찾고 촬영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가 어떤 국면과 마주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지 보여준다. 영화-기계의 물질적 속성과 키튼의 육체-기계는 이렇게 조우한다. 그는 완성된 형태로서의 영화를 결론적으로 제시하기보다 그의 육체를 사용해서 영화가 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횡단한다. 세계는 조각나거나 해체되고 심지어 폭삭 가라앉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키튼은 세상과 맞서 홀로 씨름한다. 이 드잡이가 키튼의 본질이고 오로지 그 자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