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 cross]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2015-07-27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홍석천

배우 겸 방송인 홍석천은 요즘 24시간이 모자란다. JTBC <마녀사냥>, MBC <나 혼자 산다> 출연에 이어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요리하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인테리어와 패션에 대해 조언하랴, 이태원에서는 외식업 운영까지 하랴, 정신이 없다. 얼마 전까지 TV드라마 <복면검사>(2015)에서 형사로 등장했고 틈틈이 영화의 카메오로도 얼굴을 내비쳤다. 올해 첫회를 맞은 서울국제음식영화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다. 요즘 가장 ‘핫’하다는 분야마다 홍석천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며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 연예인인 홍석천을 새로이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진 홍석천, 그를 만났다.

-매회 게스트가 원하는 요리를 만들고 승패를 가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스타 셰프들을 제치고 가장 많은 승수를 챙겼다. 비결이 뭔가.

=셰프들은 본인의 자존심을 세울 만한 요리를 내놓는다. 반면 나는 상당히 대중적인 요리를 한다. 되게 셰프들은 맛이 은근히 배어나도록 하는데 나는 은근히라는 게 없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맛으로 승부를 본다. 배우도 자기만의 확실한 분위기나 캐릭터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고 계속 가잖나. 요리도 마찬가지다.

-게스트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녹화 당일 전달받고 정말 딱 15분 안에 완성하는 건가.

=1초라도 넘기면 다들 난리다. (웃음) 나도 한번은 조기를 미처 다 굽지 못한 적이 있다. 처음 사용해보는 오븐이라 예열을 어떻게 할지 감을 못 잡아 그만…. MC와 게스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할지 그림을 그린다. 게스트의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식재료라는 게 크게 다른 게 없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연어, 새우라는 기본 베이스를 두고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응용한다. 희귀한 재료가 있으니 꼭 써 달라는 정도의 요청은 미리 받기도 한다.

-요즘 부쩍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같다. <마녀사냥> 출연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2013년 1월9일 방영한 <라디오스타>가 큰 계기가 됐다. 굉장히 오랜만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었다. 더이상 나는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했다. 그때 (윤)종신 형이 “그 녹화가 너무 재밌어서 잘하면 2회분으로 나가겠더라. 너 올해 잘될 것 같다”고 했다. 정말 반응이 좋았고 그다음부터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마녀사냥> <나 혼자 산다>에 줄줄이 출연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웃기는 홍석천과 생활인 홍석천이 동시에 TV에 보여졌다. 특히 <마녀사냥>은 아예 나더러 ‘놀아라’ 하고 놀이터를 준 셈이다. 이런 방송의 변화가 내게는 새로웠고 나를 흥분시킬 만했다.

-<마녀사냥>을 통해 ‘톱 게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성정체성을 희화화해 웃음의 소재로 삼은 면도 있지만, 방송에서 성소수자의 지분을 갖게 된 면도 있다.

=종합편성채널이긴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서 ‘게이’라는 말을 그렇게 편하게 불러준 적은 없었다.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게이’라고 하면 꼭 ‘새끼’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성소수자를 비하하거나 터부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날 보면 “톱 게이”라고 부른다.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고 잊지 못할 별칭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이 붙었다면 굉장히 질투났을 거다. (웃음)

-그동안 방송에서 성소수자로서 다른 성소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소명”, “책임감”이라는 말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상담을 많이 해왔다. 누군가는 그런다. ‘왜 잠도 못 자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느냐’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누구를 붙잡고 말하겠나. 구체적인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다.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고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내가 그들의 창이 돼주고 싶다.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뭐라고 그 친구들을 외면하나. 물론 그만큼 내 것을 많이 내려놔야 한다. 또 주변 사람, 애인한테도 서운한 짓을 많이 해야 하고. 그래도 계속 한다.

-과거에 비해 자신을 좀더 친숙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 것 같은가.

=요즘 모두가 힘들잖나. 그 와중에 시청자들이 내가 차근차근 일궈둔 것들이 하나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궁금해하는 것 같다. ‘홍석천은 세상 사람들한테 거의 밟혀 죽을 뻔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이겨냈지?’ 한편으로는 그런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질투하는 묘한 감정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10년 넘게 버티며 쌓은 내 노하우로, 여러 제약으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내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게 됐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보니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더라. 그저 내 행동과 말에 책임만 지면 된다.

-최근 성소수자 운동이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뿐 아니라 요리하는 싱글 남성들에 대한 방송가의 관심이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트렌드에 잘 묻어가고 있다. 지난해는 (신)동엽의 19금 섹드립에도 얹혀갔다. 동시에 동성애 인권 문제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 문어발처럼 여기저기 걸치고 있지만 나름 잘 통제해오고 있다.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나는 1등 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3등이 딱 좋다. 여러 군데에서 3등을 하다보면 한 군데에서만 1등 하는 사람보다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한번 일을 벌이면 오랫동안 한다.

-그러고 보니 1995년 KBS 대학개그제로 데뷔한 이후 계속 활동 중이고 2002년에 시작한 외식 사업도 10년을 넘겼다.

=부모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려면 10년은 해봐야 한다, 그전에 뭔가를 했다고 말하는 건 네 욕심이고 사기일 수 있다.’ 19살에 서울 와서 연기자가 되고 싶어 10년 동안 별의별 걸 다 했다. 내 나이 서른이던 2000년, 커밍아웃을 했고. 그 후 10년간은 ‘내 정체성은 이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를 설명하며 살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2010년쯤부터 방송이 좀 편해졌다. 외식업도 마찬가지다. 2002년 시작해 13년째다. 처음 개업할 때는 모든 게 힘들었는데 그걸 10년 넘게 하니 이제는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했지만 오다보니 길이 좀 보인다. 예전부터 프랜차이즈를 해보자는 제안은 많았지만 매번 거절했다. 10년은 채워야 뭘 해도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사업 수완도 생겼다. 하반기에 스시와 타이 요리로 프랜차이즈를 낼 계획이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분들이 5천만원에서 1억원 사이의 작은 규모로 창업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서 나도 이태원을 좀 떠나보려고 한다.

-‘홍석천 하면 이태원’이 떠오를 정도로, 이태원에서만 9곳의 식당을 운영 중이다.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데는 사업 확장의 의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이 이태원인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태원을 향한 나의 맹목적인 사랑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이태원에 대기업이 치고 들어오면서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턱없이 올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처음 이태원에 자리 잡을 때는 ‘이태원을 홍콩의 란콰이펑이나 미국의 소호처럼 만들 거야’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마치 이태원의 임대료를 올리는 데 일조한 사람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어 배신감을 느낀다.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고 싶다.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굉장한 변화다.

-올 상반기에 <오늘의 연애>(2015), <연애의 맛>(2015)에 우정 출연했고 드라마 <복면검사>로도 연기 활동을 펼쳤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연기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연기는 계속 하고 싶다. 드라마가 들어오면 하던 예능 프로도 많이 줄일 만큼 집중한다. 하반기에도 드라마를 한편 더 할 것 같고 나중에 공연도 해보고 싶고. 헤어스타일이 역할에 제한을 준다고? 사극이 있잖나. 가발을 쓸 수 있으니까 굳이 기르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사극을 노린다. (웃음)

노래가 당신을 위로하리라

“석천아~ 질겨~.” <냉장고를 부탁해> 35회에 출연한 이문세의 이 한마디에 모두가 쓰러졌다. 그동안 출연한 게스트 중 가장 강렬하고 솔직한 맛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어떻게든 끝까지 맛을 내려 도전하는” 홍석천을 이날의 승자로 꼽았다. 그때 눈시울이 붉어진 홍석천.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숨고 싶고, 죽고 싶었던 내 10대, 20대 내내 이문세 선배님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와 선배님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았다. 선배님은 언제나 내 우상이다. 그분이 건강히 우리 곁에 계시고 내 요리를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험난했던 옛 생각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지금에 홍석천은 또 한번 울고, 또다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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