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카메라, 조명 모두 컨트롤한다
2015-07-28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9개 Q&A로 해부하는 한국식 DP 시스템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촬영감독이 조명까지 관장하는 시스템이라는 뜻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DP 시스템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때로는 경험 많은 조명감독과 함께 일하는 편이 화면의 퀄리티를 수월하게 높일 수 있다. 영화의 규모와 촬영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DP 시스템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DP 시스템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를 9개 Q&A로 살펴봤다.

Q1 DP와 시네마토그래퍼의 차이는 뭔가.

넓은 범위에서 둘 다 ‘촬영감독’이다. DP가 촬영과 조명 모두 책임지는 역할에 방점을 찍는 단어라면 시네마토그래퍼는 아티스트로서 촬영감독을 의미하는 말이다. 단순히 카메라를 움직이는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감독이 원하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촬영감독에게 DP라고 불렀다가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조심할 것. DP 시스템은 촬영감독이 촬영뿐만 아니라 조명까지 관장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촬영감독이 촬영팀과 조명팀을 진두지휘해 촬영하는 방식으로, 할리우드에서 주로 쓰이는 시스템이다. 이때 개퍼(Gaffer)가 촬영감독의 주문에 따라 조명을 세팅한다(할리우드영화 엔딩 크레딧에서 조명감독에 해당되는 단어는 개퍼다. DP처럼 개퍼를 ‘Director of Lighting’이라고 표기하면 해외 영화인 누구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개퍼가 촬영팀에 소속된 할리우드와 달리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동등한 위치에서 촬영과 조명을 각각 책임진다. 역시 조명감독에게 개퍼라고 부르는 것도 한국에서는 큰 실례다. 충무로 역시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촬영감독과 조명감독 모두 공존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부 촬영감독들 사이에서 DP 시스템이 시도되다가 지금은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에 맞게 DP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상태다.

Q2 DP 시스템에서 촬영감독은 촬영팀과 조명팀만 맡나.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촬영팀과 조명팀 그리고 그립팀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립팀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데 관여한다. 크레인, 돌리, 스테디캠 등 장비를 이용한 이동숏이나 부감숏을 찍을 때 그립팀의 장비가 투입된다. 그때 촬영감독의 요구에 따라 카메라를 움직이는 사람이 그립팀의 수장, 키그립이다. 키그립은 조명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령, 로케이션 촬영에서 건물과 건물 사이에 들어오는 큰 광선을 차단해야 할 때 그립 장비를 활용한 리깅을 한다(자세한 그립팀의 역할은 57쪽 참조할 것). 촬영감독이 DP 시스템을 꾸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조명팀의 개퍼와 그립팀의 키그립이다.

<역린>

Q3 충무로 최초로 DP 시스템을 도입해 촬영한 영화가 뭔가.

한국 촬영감독으로는 <파이란>(2001)의 김영철 촬영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먼저 시도한 건 황기석 촬영감독이다. 대학 2학년 때 뉴욕에서 개퍼 생활을 하던 그는 친구인 곽경택 감독의 데뷔작 <억수탕>(1997)에서 DP 시스템을 처음 도입했다. “당시 뉴욕에서 함께 활동하던 개퍼 숀 매카델, 키그립 릭 모리슨과 함께 들어와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찍었다”는 게 당시 황기석 촬영감독의 조수였던 기세훈 촬영감독(<사랑> <극비수사> 등 촬영)의 설명이다.

<파이란>의 김영철 촬영감독 역시 DP 시스템으로 작업했다. “당시 조명 장비까지 갖추고 있어 자신의 촬영팀에 조명까지 맡길 수 있었다”는 게 영화인들의 얘기다. <정글쥬스>(2002) 때 이두만 촬영감독도 DP 시스템을 따랐다. 그가 DP 시스템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촬영과 조명을 구분하지 않는 독립영화를 함께 만들던 동료들로 구성된 팀”이기에 가능했다. 한국에서 촬영한 영화 중 DP 시스템을 가장 먼저 시도했던 영화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한 <모텔 선인장>(1997).

Q4 한국식 DP 시스템과 할리우드 DP 시스템의 차이는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카메라 오퍼레이터가 따로 있어 촬영감독은 장면을 설계하고, 찍은 화면을 확인만 하면 된다지만, 그것마저도 제작 규모나 촬영감독에 따라 다르다. 촬영감독 에마누엘 루베스키만 하더라도 직접 카메라를 들 때도 있고, 카메라 오퍼레이터에게 맡길 때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할리우드의 제작 환경과 충무로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촬영감독이 촬영과 조명 두 분야를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할리우드에서는 배우가 콜타임에 현장에 도착해 정해진 시간 안에 촬영을 하고 갈 수 있도록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는 상태지만, 충무로에서는 촬영현장에 변수가 많아 사전에 약속된 카메라 세팅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할리우드는 한 분야에 경력이 오래된 스탭들이 많아 작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충무로에서는 비교적 숙련된 스탭들이 부족하다. 제작 환경이 달라 할리우드 DP 시스템처럼 탄력적으로 운영되진 않지만, 최근 충무로에서도 사전에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 “손이 부족할 경우 조명 B팀을 가동해 다음 회차를 미리 세팅해놓기도 한다”는 게 사나이픽쳐스 한재덕 대표의 설명이다.

이재혁 촬영감독.

Q5 조명 출신 촬영감독들이 DP 시스템에 유리하다?

많은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아무래도 조명을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조명까지 관장하는 DP 시스템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신촌좀비만화>(2014), <두근두근 내 인생>(2014)을 찍은 이재혁 촬영감독은 충무로에서 대표적인 조명 출신 촬영감독이다. 그는 원래 촬영 전공이다. 서울예대 영화과, 한국영화아카데미,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모두 촬영을 전공한 그가 조명을 하게 된 건 “미국에서 개퍼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미국에서 촬영감독이 빛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익혔다. 그곳에서 돈도 벌어야 해서 조명 일을 시작했는데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게 이 촬영감독의 얘기다. 개퍼 생활을 하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깨달은 개퍼의 역할은 “촬영감독이 구상하고 있는 빛을 함께 고민해 빨리 세팅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한국에 들어와 조명감독으로 일할 때와 촬영감독으로서 DP 시스템을 운용할 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말아톤>(2005),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 <7급 공무원>(2009), <특수본>(2011), <마마>(2011),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 많은 영화에서 조명을 맡다가 <신촌좀비만화>에서 류승완 감독의 에피소드 <유령>으로 촬영감독 데뷔했다. 그는 “촬영감독은 앵글만 잘 잡는 사람이 아니라 후반작업까지 빛과 색감을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그는 <그놈이다>를 찍었고, <서부전선>의 색보정 작업을 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

Q6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진짜 시네마토그래퍼는 홍상수 감독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구상한 그림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시네마토그래퍼라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시네마토그래퍼는 홍상수 감독이다.” <하하하>(2010)부터 최근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까지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촬영해온 박홍열 촬영감독의 말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그의 촬영팀은 DP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박홍열 촬영감독은 “스탭 수가 보통 상업영화에 비해 적다보니 촬영감독과 스틸기사가 조명감독과 함께 조명을 세팅할 때도 있고, 조명감독이 포커스 풀러를 해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홍상수 감독은 관객이 사실적으로 화면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을 주문하고, 원하는 앵글이 있다. 날씨나 햇빛의 위치에 따라 찍고자 하는 그림도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 영화에서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은 “그가 원하는 그림을 함께 구현하는 역할”이다. 박홍열 촬영감독은 “촬영감독도 일종의 배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팬이나 줌이 인서트컷으로 종종 쓰이는 보통 상업영화와 달리 홍 감독님 영화에서는 팬이나 줌을 할 때 인물의 감정을 실어 감독님이 생각하는 속도에 맞게 카메라를 움직여야 한다. 촬영감독으로서 무척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관상> 촬영현장.

Q7 DP 시스템으로 자신의 촬영팀을 운영하던 고낙선 촬영감독이 <관상>(2013)과 <역린>(2014)에서 자신의 개퍼 대신 신경만 조명감독과 손을 잡은 이유는.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역린>, <관상>을 촬영한 고낙선 촬영감독 역시 조명감독 출신이다. <바람난 가족>(2003), <…ing>(2003), <발레교습소>(2004), <그때 그사람들>(2005), <오래된 정원>(2007) 등 여러 영화에서 조명을 맡았던 그다. 촬영감독 데뷔작인 <비스티 보이즈>(2008),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DP 시스템으로 찍다가 <관상>과 <역린>에서 신경만 조명감독과 손을 잡았다. “<관상> 때 함께했던 건 신경만 조명감독님이 먼저 합류해 계셨기 때문이다. 호흡을 맞춰보니 서로 조명 스타일이 달라 <역린>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리얼한 조명을 좋아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먼저 생각한다. 자연광이 있으면 그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반면 신경만 조명감독님은 굉장히 디테일하시다. 자연광이 있어도 그 빛을 끊어서 새롭게 연출하신다. 그러다보니 화면의 퀄리티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게 고낙선 촬영감독의 설명이다. DP 시스템과 조명감독 모두 경험한 까닭에 누구보다 DP 시스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조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촬영감독이 DP 시스템을 운영하게 되면 현장에서 조명 세팅하는 데만도 오래 걸린다. 때로는 DP 시스템이 아닌 조명감독과 함께 작업할 때 시너지 효과가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스토커> 현장, 정정훈(맨 오른쪽) 촬영감독.

Q8 <아가씨>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키그립을 데려온 이유는.

현재 촬영 중인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현장에는 맷 불러리라는 이름의 외국인 스탭이 있다. <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를 함께한 인연으로 정정훈 촬영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모셔온 키그립이다. 그는 <워리어>(2011), <리얼 스틸>(2011),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2014) 같은 영화에서 키그립이나 그립팀으로 참여한, 실력 좋은 스탭이다. 할리우드에서 <스토커>(2013), <블러바드>(<Boulevard>, 2014)를 연달아 찍으면서 정정훈 촬영감독은 조명감독만큼이나 키그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마침 맷 불러리가 한국영화 작업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는 <아가씨> 촬영 전에는 로케이션 헌팅을 따라가 공간의 특징을 파악해 정 촬영감독에게 적합한 장비를 제시하고, 장면 설계를 도왔다. 촬영현장에서는 카메라 무빙을 안전하게 이끌고, 카메라 앞에서 배우의 위치를 능숙하게 지정하는 등 키그립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맷 덕분에 키그립 시스템을 내 방식대로 시도해보고 있고, 촬영감독으로서 장면을 설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Q9 충무로에서 할리우드 DP 시스템을 구현하는 게 정답일까.

꼭 그렇진 않다. 물론 산업 분위기는 DP 시스템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촬영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른 만큼 자신에게 적합한 시스템을 선택하는 게 옳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굳이 DP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조명감독이 있다면 그와 함께하는 게 훨씬 편하다”라고 얘기한다. 박홍열 촬영감독 역시 “때로는 DP 시스템이 촬영감독에게 큰 짐이 될 수 있다. 촬영팀이 조명까지 관장하게 되면 짊어져야 할 일이 많아지고 책임도 커진다. 할리우드가 아닌 이상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DP 시스템에는 정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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