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안 하는 영화감독이 어디 있겠냐마는 최근작만 보면 이석훈 감독은 제대로 고생할 팔자인가보다. 전작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 2014)이 바다 CG와 사투를 벌인 블록버스터였다면, <히말라야>는 무거운 실화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해발 8750m 높이의 산을 담아낸 산악영화다. 충무로가 산악영화의 불모지인 걸 감안하면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전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산악영화를 찍고 나니 산이 좀 달라 보인다”고 말한다. 막 언론 시사회를 마치고 인터뷰 장소에 들어온 이석훈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던 지난 1년 반은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이었다. 좋은 추억이 됐다. 배우, 스탭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겨울 시장에 나서는 출사표를 던졌다.
-평소에 등산을 즐기나.
=즐기진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영화인들과 6개월 정도 산을 오르기도 했다. 요즘은 그렇게 못하고. 꼭 정상을 오르기보다 경치가 좋은 곳까지만 가는 스타일이다. (웃음)
-<히말라야>는 제작사 JK필름이 약 4년 전부터 준비하던 작품이다. <해적>이 끝날 때쯤 연출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히말라야> 아이템을 처음 개발할 때 JK필름은 주변 사람들에게 MBC 2부작 다큐멘터리 <아! 에베레스트>를 15분짜리로 편집한 하이라이트 영상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지’ 물어본 적 있다. 나는 주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만 해도 연출을 맡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대규 감독이 준비하고 있던 <히말라야>가 여러 곡절 끝에 내게 왔다. 시각효과가 많이 시도된 <해적>을 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붙었던 덕분에 <히말라야>를 맡을 수 있겠다 싶었다.
-당시 방송 다큐멘터리 <아! 에베레스트>를 보고 어땠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연이지만 다큐멘터리가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잖나.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큐멘터리가 실화의 밝은 면을 강조했다면 영화는 조금은 어두운 면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인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죽은 동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건 산사람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얘기인데, 속세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내가 썩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실화이기에 부담감은 없었나. 캐릭터 이름도 실명 그대로 썼다.
=물론 부담감이 컸다. 촬영하면서도 나나 배우들이 미묘하게 중압감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성 없이 만들면 안 된다는 마음도 항상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감동 지점은 휴먼 원정대가 박무택 대원 시신 앞에 섰을 때이지만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여기에 영화적인 재미를 더하려면 동료 시신을 찾았다는 슬픔과는 다른 무언가를 담아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왜 산에 가는지, 산에 가면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엄홍길과 박무택이 텐트를 치지 않고 빙설벽에 기대 하룻밤을 지새우는 신이었다. 함께 목숨을 건 동료와 대화를 하며 정을 나누는 장면 말이다. 그게 다큐멘터리가 보여주지 못한 감동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산악영화는 흥행에서나 비평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장르다.
=주인공이 산을 등정하는 이야기였다면 연출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은 동료의 시신을 구하러 가는 휴먼 드라마가 산보다 더 중요했다. 아직 관객에게 산악영화가 낯선 장르지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열심히 만든다면 좋아해주실 거라 생각했다.
-<히말라야>에 합류한 뒤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수정했나.
=제작사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시나리오인 까닭에 여러 버전이 있었고, 각 버전의 장점을 취합하려고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지만 허구라고 가정했을 때 이야기의 약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유머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박무택이 죽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유머를 이야기에 담아보려 했다. 또 라미란, 김인권, 정유미 등 조연진에 힘을 더 실어주었다.
-주인공이 산을 등정하는 전형적인 산악영화와 달리 <히말라야>의 서사는 죽은 동료의 시신을 구하는 게 목표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전반부에 인물들을 소개하고 엄홍길과 박무택이 칸첸중가를 등정하는 이야기가 배치됐다면, 후반부는 엄홍길이 휴먼 원정대를 꾸려 죽은 박무택의 시신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로 구성됐다. 이러한 서사 방식이 감독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영화의 절반을 박무택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는데,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에서 죽은 그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이야기의 중간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그러한 서사 방식이 전형적인 할리우드 산악영화와 차별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영화가 두 이야기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면 실패지만, 좋은 의미에서 산악영화 두편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 성공이라고 봤다. 이야기의 전반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도 그래서다. 인물을 잘 소개해야 하고, 웃음도 줘야 하며, 박무택이 죽었을 때 관객의 주의를 계속 집중시켜 자연스럽게 후반부로 넘어가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박무택을 맡은 정우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 같다. 과묵했다던 실제 박무택 대원과 달리 영화 속 박무택은 애교 많은 후배다.
=영화 속 엄홍길 대장이 무택에게 마음을 여는 것처럼 관객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무택에게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홍길 대장과 함께 관객이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무택은 실제 인물과 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코미디이다 보니 말도 많아지고, 코믹한 캐릭터로 만들어지게 된 것 같다. 분명한 건 칸첸중가를 등정한 뒤 엄홍길과 박무택이 형제 같은 사이가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참고했던 산악영화는 무엇인가.
=지난 9월 개봉한 <에베레스트>(감독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2015)는 후반작업할 때 봤다. 가장 많이 참고했던 영화는 독일영화 <노스페이스>(감독 필립 슈톨츨, 2008)였다.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인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는 이야기인데 최근 만들어진 산악영화 중 가장 좋았다. 산악인이 올려놓은 유튜브 영상들을 열심히 보기도 했다. 할리우드 산악영화는 우리와 컨셉이 달라 크게 참고하진 않았다.
-영화가 산을 보여주는 방식이 제각각이었다. 엄홍길과 박무택이 칸첸중가를 등정하는 전반부가 전형적인 산악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면 휴먼 원정대가 박무택의 시신을 구하러 오르는 후반부는 산을 공포스럽게 묘사했다.
=얘기한대로 초반에는 박무택이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편집자)에 빠지는 신을 포함해 산악영화의 컨벤션들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전형적인 장면이 가져다주는 긴장감이 분명히 있고 그걸 기대하는 관객도 있으니까. 반면, 휴먼 원정대의 등반 신은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 풍광보다 사람을 보여주려고 했다.
-배우 황정민과는 <댄싱퀸>(2012)에서 호흡을 이미 맞춘 바 있다. 덕분에 이번 작업은 수월했을 것 같다.
=그때 형성된 황 선배님에 대한 믿음 덕분에 큰 힘이 됐다. 내가 현장에서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황 선배님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외롭지 않게 작업할 수 있었다. 또 합숙 생활을 하면서 다음날 촬영 분량에 대한 얘기를 하며 불안감을 달랠 수 있었다.
-실화와 달리 정유미가 연기했던 무택의 아내 수영은 휴먼 원정대의 베이스캠프를 찾는다. 이렇게 각색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녀도 남편이 잠들어 있는 히말라야를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데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분명히 남편을 산에 두고 오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시신을 끝까지 가지고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산에 두고 올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엄홍길에게 무택을 두고 내려갈 수 있는 명분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관객이 엄홍길의 그런 고민에 좀더 납득할 수 있게 하려면 미망인이 등장해 그런 얘기를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의 후반부, 동료 대원들이 엄홍길에게 “대장님은 왜 무택이만 좋아했냐”고 서운해한다. 영화 속 엄홍길은 박무택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엄홍길과 박무택은 말없이 줄에 힘만 줘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관계였던 것 같다. 나를 이해해주고 내 목숨까지도 맡길 수 있는 관계이기도 했을 것 같고.
-차기작은 무엇인가.
=<해적>의 속편은 아직 시나리오 개발 단계다. 배우들이 다시 뭉칠 수 있을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그외에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다. <히말라야>가 잘되면 자신감이 더욱 생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더 많은 고민을 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