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름다운 괴수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부활하다
2015-12-22
글 : 장영엽 (편집장)
<대호>를 미리 보니

<대호>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 우리는 왜 괴수에 매혹되는가?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괴수의 크기와 힘, 기묘한 모양새와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성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음지를 배회하던 괴수가 서스펜스를 자아내다가 마침내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침내 압도적인 파워로 상대를 제압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의 성공 여부는 괴수를 얼마나 멋지고 효과적으로 구현해내느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괴수의 매력은 물리적인 존재감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괴수가 지닌 사연과 정서가 복합적일수록 이 미지의 존재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 사례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면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저나 <킹콩>(2005)의 콩,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대호>에 대한 기대 또한 ‘조선 호랑이’라는 괴수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몸무게 400kg에 꼬리 길이 1.2m, 몸길이 3.8m에 다다른다는 이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존재는 한국영화는 물론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리안의 3D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리처드 파커가 있긴 했지만, 이 벵골 호랑이는 영화 내내 작은 배 위에 머물며 액션보다는 드라마를 위한 존재로 기능했기에 <대호>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면모를 유추하는 데 적합한 예는 아닌 것 같다. 호랑이라는 괴수가 지닌 고유의 특성도 영화 <대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호랑이는 고질라나 카이주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이계의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인원처럼 친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적당히 친숙한 존재이면서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잔혹함을 지닌 호랑이의 양면성이 ‘대호’라는 캐릭터에 어떻게 녹아들었을지 지켜보는 것도 관건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호>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궁금증은 호랑이를 얼마나 근사하게 표현해냈느냐는 거다. 멋진 무늬와 잘 단련된 근육, 날카롭고도 영험한 눈빛을 지닌 이 아름다운 괴수를 한국영화에서 목도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호>는 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한 영화다.

조선 호랑이가 이 땅에서 멸절하게 된 이유

<대호>의 시대적 배경은 호랑이 사냥이 횡행하던 일제강점기다. 조선 호랑이 포획에 신들린 집착을 보이던 일본의 고위 관료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지리산의 산군으로 불리는 대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 류(정석원)에게 대호 사냥을 지시하고, 지리산에서 오랫동안 사냥을 해왔던 조선 포수대원들이 대호의 뒤를 쫓는다. 한편 한때 조선 최고의 명포수라고 불렸던 천만덕(최민식)은 어떤 연유로 포수일을 그만두고 지리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아가고 있다. 그의 삶에 남은 거라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석(성유빈)이다. 만덕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동료이자 조선 포수대의 일원, 구경(정만식)과 칠구(김상호)는 만덕을 찾아와 대호 사냥에 합류할 것을 간청하지만 그는 한사코 그들의 청을 거절한다. 본토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마에조노의 독촉은 갈수록 심해지고, 류와 구경은 다급한 마음에 만덕을 움직이기 위해 천진난만한 그의 아들 석이에게 접근한다.

대호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앞서 펼쳐지는 건 일제강점기 시절, 혼탁한 인간 세계의 풍경이다. 일본군의 지배 아래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다급해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지켜왔던 자연의 순리와 관습을 조금씩 저버리기 시작한다. “잡을 놈만 잡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라 여기고 “불은 일단 댕기면 업이 따른다”고 믿어왔던 조선의 포수들이 변하게 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마을 한복판에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겨왔던 호랑이의 시체가 쌓여가고, 포수들의 마음속에는 안타까운 마음보다 당장 며칠 끼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박훈정 감독은 이를 “시대가 강요하는 ‘욕망’”이라고 명명한다. “조선 호랑이의 사냥을 명하며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내걸었던 이유는 호랑이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니 우리가 잡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인들의 정기를 말살시키려고 호랑이를 잡는다 했다더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선 호랑이의 씨가 마른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조선 호랑이 박제를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들에게는 이런 핑계를, 일본인들에게는 저런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그들의 욕망을 채운 거다.” 결국 조선 호랑이로 대변되는 ‘자연’을 파괴한 건 인간의 욕망이라고 박훈정 감독은 말한다. 등장인물 저마다의 욕망이 충돌과 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거대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혈투>(2010)와 <신세계>(2012)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박훈정 감독의 주된 관심사였다면, <대호>에서 그 파국은 인간 세계를 넘어 자연으로까지 전이된다.

지리산의 산군이라 불리는 ‘대호’와 조선의 명포수 천만덕은 이처럼 모든 것이 혼탁한 잿빛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파국의 한복판으로 불러내는 건 다른 이들의 욕망이자 이들도 어찌할 수 없는 부성애 때문이다. 포수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호랑이 새끼의 시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호와 흉흉한 세상으로부터 아들을 지키려 지리산 한복판에 남아 있길 택한 만덕은 여러모로 닮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어떤 과거사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대호>는 이 두 ‘주인공’의 오랜 인연을 플래시백을 통해 점진적으로 공개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영화가 이들의 사연을 절절한 신파로 풀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을 대변하는 존재답게, 대호와 천만덕은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고독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다.

대호, 액션 블록버스터의 주인공

일제강점기라는 특정 시대 안에서 들끓던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 뒤, 그 욕망이 유발하는 파국으로 달려가는 지점에서 <대호>의 이야기도 속력을 낸다. 무엇보다도 대호의 압도적인 힘과 위엄을 보여주는 후반부 액션 시퀀스가 근사하다. 호랑이가 CG 캐릭터라는 점을 감안해 우회적으로나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이 영화는 완성도 높은 CG와 호랑이의 시선을 반영한 개성 있는 촬영, 호랑이의 육중한 무게감과 속도감을 반영한 액션이 효과적으로 맞물린 성공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호랑이의 비중이 전체 영화의 40%에 달하는 <대호>는 CG로 구현된 주연배우 ‘김대호’(영화의 제작진이 붙여준 애칭이다)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혈족을 해친 자들에 대한 분노, 표적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잡아채는 액션, 오랫동안 지리산이라는 공간을 공유해왔던 인간에 대한 종족을 넘어선 유대감을 선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대호가 소화해야 했던 건 액션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것이다.

<대호>는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던 박훈정 감독의 테크니션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올해 개봉했던 한국 블록버스터영화에 비해 진중하고 느린 서사의 전개가 어떤 관객에게는 다소 익숙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복합적인 인물들과 풍성한 서사, 매력적인 괴수를 갖춘 이 영화는 한해를 닫는 블록버스터영화로서 꽤 만족스러운 관람의 경험을 선사할 거다. 이제 한국영화에서 어떤 괴수가 등장한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긍정의 짐작도 함께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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