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버필드 10번지>(2016) <링컨: 뱀파이어 헌터>(2012) <더 씽>(2011)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다이하드 4.0>(2007) <데쓰 프루프>(2007) <파이널 데스티네이션>(2006)
흰색 탱크톱에 청바지,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깨어나 방 안을 서성거린다. 큰 눈을 껌벅거리며 불안에 떠는 그녀의 모습은 별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약해 보이지만 숱한 위기를 아슬아슬 헤쳐나갈, 우리가 숱하게 보아온 호러영화의 여주인공 딱 그대로다. <클로버필드 10번지>가 범죄 스릴러와 호러, SF의 혼합물이라면 그중 호러를 떠받치고 있는 건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는 호러영화가 사랑할 정확한 전형을 그대로 빚어놓은 것 같은 배우다. 일명 호러의 여왕. 재미있는 건 그녀가 수많은 호러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이미지를 쌓아온 것이 아니라(물론 적지 않은 호러영화에 출연하긴 했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타고났다는 점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미인이면서도 적당히 친숙한, 어수룩한 주인공의 오래된 ‘여자 사람친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다만 숱한 영화들이 생산, 반복, 유통해온 그 이미지를 벗어나려거나 거부하려 한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신인배우가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장르영화에 편입하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얼굴을 알린 후에도 그 장르 언저리에 맴도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저예산영화가 더 몸에 맞고 마음이 편해서” 자주 찍는다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의 필모그래피는 일견 지저분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랙 크리스마스> 등 조악한 만듦새의 영화에도 서슴없이 출연했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같은 기발한 영화에도 나왔다. 솔직히 빈말로도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역할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조차 기꺼이 받아들인 후 즐기는 것처럼 보여 몹시 사랑스럽다. 작품을 뛰어넘은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적도 없지만 작품이 요구하는 역할에서 실망을 안긴 적도 없다. 믿고 쓰는 B급 감성의 배우, 얼굴은 익숙하지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호러의 여왕은 그렇게 태어났다. 호러의 여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호러영화에 출연하지도 않았다. 그저 <데쓰 프루프>의 아름다운 치어리더 리처럼 짧고도 강력한 임팩트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클리셰를 거부하기는커녕 스스로 클리셰의 일부가 된 배우. <클로버필드 10번지>처럼 한판 게임 같은, 맥거핀 자체가 영화의 동력인 영화에서 그녀만큼 어울리는 배우도 없을 것이다. 한때 발레리나를 꿈꿨던 소녀는 지금도 주•조연, 규모, 장르 구분 없이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다. 설사 당신이 이 전형적인 미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친근한 매력까진 잊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