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그의 디스토피아로의 초대 - 특별전 '나카시마 데쓰야의 고백'
2016-07-11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2011)과 <갈증>(2014)을 연출한 나카시마 데쓰야의 전작이 <불량공주 모모코>(2005, 이하 <모모코>), 그리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7, 이하 <마츠코>)이란 사실은 당혹스럽고 신기하다. 물론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한번에 알아챌 만한 고유 인장을 품은 영화들로 모조리 채워지는 것만큼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루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감독마다 선호랄까 지향점이랄까, 어떤 희미한 일관성 정도는 있기 마련이고, 그걸 다 지워버리는 것은 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나카시마 데쓰야를 생각할 때 이 지점은 꽤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불량공주 모모코>

‘환상’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나카시마 데쓰야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아니, 어느 영화 주인공이 그렇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세계’의 강도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로코코풍의 나풀나풀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모모코나 특공복 차림의 폭주족 소녀 이치코(<모모코>), 혹은 언젠가 사랑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끔찍한 일생을 버텨낸 마츠코(<마츠코>) 정도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모모코>와 <마츠코>에서 나카시마 데쓰야는 이야기를 끌고 갈 사건들의 개연성을 짜 맞추는 대신 인물들의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데 훨씬 많은 공을 들인다. 이때 일반적으로 영화가 취하는 전략은 두 가지다. 이 세계를 관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인정 투쟁을 그리거나 혹은 단단했던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져가는 과정을 담거나. 하지만 나카시마는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모모코와 이치코의 세계는 우여곡절 끝에 둘이 친구가 되면서 공존 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희석된 것은 아니다. 끝까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마츠코의 세계는 무너졌을지언정 마츠코는 이해받기 위해 세상에 타협을 구걸하지 않는다. 다만 <모모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들의 고립된 세계가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카시마의 낙관적 이상향이라면, <마츠코>는 똑같은 자리에서 세상이 어떻게 이들의 세계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나카시마의 비관적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하지만 나카시마는 모모코, 이치코, 마츠코 모두에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낼 ‘환상’도 마련해준다. 모모코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두고 하늘로 붕 떠오르는 공상에 빠져 기분을 달래고, 따돌림당하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이치코는 상상 속에서 ‘전설의 폭주족’ 히미코를 만들어낸다. 힘들 때마다 마츠코가 꺼내 보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갔던 놀이동산의 기억이지만, 마츠코가 부르는 노랫소리와 함께 이 기억은 환상의 옷을 덧입는다. 바로 이 ‘환상’의 사용이 나카시마의 초기 두편(<모모코> <마츠코>)과 이후 두편(<고백> <갈증>)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다.

<고백>

<고백>에서 중학교 교사 유코(마쓰 다카코)는 자신의 딸을 죽인 반 학생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하나씩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정작 복수에 대한 폭탄 고백을 한 유코는 영화 초반 사라진다. 대신 <고백>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10대들의 ‘세계’다. 아무렇지 않게 반 친구들을 따돌리고 끔찍한 일들을 어떤 죄의식도 없이 깔깔대며 저지르는 아이들의 끔찍한 속내가 하나씩 밝혀진다. 아이들은 자신을 떠나간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살인자를 추종하며, 낙오되지 않기 위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힌다. <갈증>에서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키카주(야쿠쇼 고지)가 맞닥뜨린 세계 역시 10대들의 지옥도다. 그러나 나카시마는 모모코와 이치코, 마츠코에게 열어두었던 환상의 가능성을 <고백>과 <갈증>의 아이들에겐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환상이란 마약을 통해 만들어낸, 깨고 나면 두통만 남는 병적 환상뿐이다. <모모코>와 <마츠코>에서 인물들이 ‘상승’한다면 <고백>과 <갈증>의 아이들은 ‘하강’한다. 모모코는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고, 고통의 끝에 선 마츠코는 계단을 올라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그러나 <갈증>에서 카나코의 남자친구는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그녀 역시 자신이 ‘깊은 구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낙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고백>의 아이들은 유코의 딸을 수영장으로 던져버린다. 나카시마는 교실 창밖으로 내던져진 책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타협 불가능한 고립된 세계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지만, 이 세계를 대하는 나카시마의 태도는 초기작 두편과, 이후 두편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고백>과 <갈증>을 보면서 느꼈던 낯섦은 아마도 이 때문이다.

<파코와 마법 동화책>

<파코와 마법 동화책>

그런데 잠깐, 하나 놓친 것이 있다. 잘 거론되지 않지만 <마츠코>와 <고백> 사이에 <파코와 마법 동화책>(2010, 이하 <파코>)이 놓여 있다. 야쿠쇼 고지가 ‘개구리 왕자’로, 쓰마부키 사토시가 ‘가재 대마왕’으로 등장하는 이 기이한 ‘동화’는 사실 나카시마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일종의 ‘별책 부록’ 같은 영화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 파코를 위해 마법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파코가 매일 읽는 동화책을 연극으로 만들어낸다. 우렁 탈을 쓴 환자가 연못에서 튀어나오고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본다. 의사는 치료하는 대신 ‘마법의 금가루’를 환자들에게 뿌려댄다. 나카시마는 모모코가 꿈꾸고 마츠코가 도달하고 싶어 한 세 상을 <파코>에서 마음껏 선보인다. 모모코와 이치코를 ‘왕따’시키고, 마츠코의 일생을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어낸 현실 따윈 <파코>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파코>는 자신의 세계를 지켜낸 모모코와 마츠코에게 들려주는 환상의 이야기이자 <갈증>과 <고백>의 10대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유년의 동화인 셈이다. <파코>의 동화책을 덮는 순간, <모모코>와 <마츠코>의 세계는 끝나고 우리는 <갈증>과 <고백>의 끔찍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혹시 <모모코>와 <마츠코>을 보았던 당신이 <고백>에 놀라고 <갈증>에 당황했다면,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기간에 열릴 예정인 나카시마 데쓰야 특별전에서 <파코>를 꼭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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