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이 쓴 <만약은 없다>는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의사의 치열한 투쟁 기록이다. 삶과 죽음이 시시각각 결정되는 응급실이란 공간. 그곳에서 저자는 한명이라도 더 삶의 품으로 끌어오고자 분투하지만 차마 막지 못한 환자의 죽음에 대해선 그 순간을 곱씹고 마음에 새긴다. 1부에서는 저자가 지키지 못했던 생을 돌이켜본다. 병명에 가려진 환자 저마다의 사연과 긴박했던 의료 과정을 생생하게 더듬는다. 2부는 응급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인간사와 거기에 담긴 희로애락을 그린다. 1부보다는 훨씬 경쾌한 톤으로 휴머니티 가득한 에피소드들을 담는다. 38편의 이야기 끝에는 공통적으로 통렬한 자기반성의 시간이 따른다. ‘만약은 없다’라는 단언은 저자 남궁인이 의사로서 견지하는 태도와 닿아 있다. 새로운 환자를 만날 때마다 의사 남궁인은 헛된 희망 대신 단호한 다짐을 더한다. <만약은 없다>에는 한국의 의료현실과 사회현상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적절한 수술을 집도해줄 의사가 없어 죽어간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흉부외과의 열악한 현실을, 루게릭병이라는 치명적인 병환으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은 환자의 사례를 통해서는 축제처럼 유행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암을 그린다.
저자는 <만약은 없다>에 소개된 일화들이 본인이 직접 겪은 것임을 밝힌다. 하지만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상황을 일부 변형하고 가공하면서 책은 소설로서의 성격이 짙어졌다. 국어국문학과 진학을 고민할 정도로 문학을 사랑했던 저자의 면모가 유려한 문체와 드라마틱한 글의 구성에서 느껴진다. 이 책은 ‘글 쓰는 의사’로 이름난 저자가 SNS상에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장가로서의 재주보다 단연 주목되는 것은 죽음과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환자와 의사가 벌이는 사투는 인간의 무력함을 부각한다기보다 오히려 삶과 의지의 숭고함을 되새긴다.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의사의 투쟁 기록
목 한가운데 기관절개의 흔적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한번은 스스로 호흡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의사는 의미 없는 절개를 하지 않는다. 그 흉터는, 그것이 없었다면 그가 호흡부전으로 죽었으리라는 뜻이다. 목덜미에 있는 중심정맥관의 흉터도 그렇다. 그걸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그 시술이 없었으면 순환부전으로 죽었을 것이다. 내 눈에 그 거친 자국들은 분명히 그렇게 읽힌다. 그것은 이승과 그들을 이은 끈이라고.(64쪽)
시체는 두렵지 않지만, 죄스러움은 한없이 두려웠다.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잘못했다고, 인간이 인간을 다룸에 미안하다고 덧붙여 매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시체가 하얀 포를 뒤집어쓰고 영안실로 나갈 시간이 되어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나를 두드려 깨우고 시체를 정리할 때까지, 내가 방금 한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이제 막 죽어버린 그 표정의 무게를 내 어깨 위에 얹었다.(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