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진 감독의 <춘천, 춘천>에는 두개의 춘천, 두번의 춘천 기행이 있다. 춘천내기 청년 지현(우지현)은 서울로 취업 면접을 갔다가 침체된 마음으로 돌아와, 친근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도시를 돌아다닌다. 한편 세랑(이세랑)과 흥주(양흥주)는 서울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우자 아닌 상대와 춘천으로 2박3일 여행을 떠나온다. 지현의 시간은 괴어 있고 흥주와 세랑의 시간은 붙들 수 없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 옆을 방심한 채 지나가는 장면이 두 차례 나온다. 정해진 거리를 결승점까지 일방질주하는 사람들의 집중한 얼굴은, <춘천, 춘천>의 인물들이 짓는 표정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처음에는 춘천에서 청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장우진 감독의 관심사는, 같은 공간에 흐르는 다른 시간을 그려보자는 목표로 발전했다. “2014년 추석 무렵 춘천행 ITX 청춘열차를 탔는데 어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권하며 조심스레 대화하고 있었다. 소리 죽인 이어폰을 끼고 엿들었다. (웃음) 그 순간 데칼코마니 형식이 떠올랐다. 두 이야기가 마주치지는 않되 마주보게만 하고 싶었다.” 영화는 세 사람이 한 화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존하는 열차 안에서 시작해 지현의 시간을 따라간 다음,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다시 춘천역 출구로 돌아와 커플의 2박3일을 지켜본다. 그러나 1부와 2부의 타임라인은 정확히 평행하지 않는다. 흥주와 세랑의 여행은 사흘로 명시되지만 지현의 그것은 모호하다. 저수지처럼 머물러 있는 현지인의 시간이니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단, 청평사 은행잎의 색이 지현이 더 늦게 그 자리에 왔음을 암시한다. 실제로도 지현의 이야기를 절반까지 찍은 다음, 2부를 촬영하고 1부의 나머지를 찍었다.
이쯤 되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장우진 감독은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함께 사업을 했던 부모님은 외동아들을 위해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삼사십만원을 예치하고 마음껏 영화를 보도록 해주셨고, 급기야 소년은 중학생 때 이미 훤히 내다보이는 할리우드영화에 싫증을 내게 되었다. 급기야는 영화미술을 업으로 삼기 위해 미대에 진학했다. 장우진 감독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 <춘천, 춘천>, 그리고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장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한 첫 장편 <새출발>과는 이보다 다를 수 없는 영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연인즉, 영화제작 실습에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장우진 감독은 인물과 공간을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일에 본인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 그림을 그렸기에 막연히 세트디자인을 꿈꿨으나 정작 본인이 사랑한 부분은 ‘그리기’가 아니라 실존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단국대 영화과 대학원에서 영화를 다시 공부한 장우진 감독은, 현실의 장소에서 거기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들어가는 영화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빛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사실상 달리 쓸 수 있는 재료가 없기도 하다. 지도교수 박기용 감독의 조언을 따라 장우진 감독은 시나리오나 콘티 없이 트리트먼트만 갖고 촬영현장에 나갔다. 촬영, 녹음, 편집, 색보정, 믹싱까지 감독 손으로 소화하는 단출한 행장이기도 하다. “현장의 조건을 반영하기 쉽다. 설득할 다른 스탭이 별로 없으니. (웃음)”
<춘천, 춘천>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평자들이 거론한 영화는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1998), <생활의 발견>(2002)과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2006) 그리고 차이밍량의 작품들이었다. <춘천, 춘천>이 홍상수의 구조, 지아장커의 지역성, 차이밍량의 비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장우진 감독은 절반쯤 끄덕였다. “스토리보다 형식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홍상수 감독님의 시도들이 굉장히 존경스럽다. 그러나 감독 머릿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극중 인물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아주 좋아하는 부분과 싫어하는 부분이 공존한다고 할까.”
<새출발>과 <춘천, 춘천>의 결말에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체념이 어려 있다. 여기로부터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출구를 찾을 수 있는데, 제가 출구가 보이는 이야기 구조를 발견하지 못한 거다. 아직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장우진 감독의 현실은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발빠른 유럽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춘천, 춘천>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내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 3인3색 프로젝트 연출이 기다리고 있다. 제작사 봄내필름을 공동설립한 김대환 감독(<철원기행>)의 신작 프로듀싱도 2017년에 예정된 일 중 하나다. 현재 국내 배급 방법을 고민 중인 <춘천, 춘천>을 미리 보고 싶은 관객이 가야 할 곳은 12월1일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다.
시놉시스
서울에 직장을 구해 고향 춘천을 벗어나고 싶은 20대 후반의 청년 지현은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ITX 청춘열차 안에서 수줍게 대화하는 중년 남녀와 스쳐간다. 집에 온 지현은 익숙한 풍경 속을 소요한다. 이름을 잊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청평사에서 예불을 하고 친구 어머니의 식당을 찾아 일을 거든다. 한편 지현이 기차에서 본 흥주와 세랑은 2박3일 동안 젊은 시절 이후 처음 찾은 춘천을 구경하며 비밀스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동선은 지현의 그것과 시차를 두고 겹치며 같은 지점에서 시작해 먼 곳에서 끝난다.
마음의 풍경
세트는커녕 인공조명도 사용하지 않은 <춘천, 춘천>에서는 인물과 풍경이 모든 것이다. 상황과 대략의 화제만 주어진 상태에서 촬영한 배우들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늘어지는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몰래 여행 온 중년 커플로 분한 양흥주, 이세랑 배우가 식당에서 나누는 긴 대화는, 빛의 변화마저 어우러져 영원 같은 사랑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 밖에도 <춘천, 춘천>에는 인물과 환경이 하나가 되어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대목이 많다. 해무 앞에 선 인물, 마지막 배를 타기 위해 달리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는 익스트림 롱숏, 누군가 오려붙인 듯 노랗게 타오르는 은행나무 등이 모두 심경(心境)이다. 장우진 감독이 발견하고자 애썼던 순간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