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소녀의 마음속으로 줌인! - <용순> 신준 감독
2016-10-24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이동훈 (객원기자)
부산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

용 용에 순할 순. 엄마가 낳을 때 용썼다고 용순(이수경)이라 이름붙여진 소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수상한 신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용순>은 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쓸 때 문득 용순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여자 이름 같기도 하고 남자 이름 같기도 하고, 어느 시대 이름인지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매력이 있더라. 그리고 이 이름이 앞글자는 세고 뒷글자는 부드럽다. 굉장히 저돌적이지만 알고 보면 여린 구석도 많은 내 영화 속 인물에 잘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소녀 용순은 육상부를 이끄는 체육 선생님을 좋아한다. 선생님도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다는 친구의 귀띔에 용순의 집착이 시작된다.

<용순>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은 친절 하나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사소한 무심함에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시기. 용순에게 체육 선생님은 그녀의 작은 세계의 전부다.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엄마가 그녀에게 그랬듯, 용순은 동네 개울가에서 주운 자갈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자갈을 한데 모아 선생님에게 줄 ‘100일 선물’을 준비한다. 용순과 선생님은 어떤 관계일까. 용순의 생각처럼 둘은 비밀스럽게 만남을 이어가는 관계일까. 혹은 그저 제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줬을 뿐인 선생님에 대한 용순의 착각일 뿐인가.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순간까지 보는 이들에게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답안지를 비워둔 채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건 <용순>의 서사적 전략이기도 하다.

감정의 격랑은 사춘기를 통과하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소년과 소녀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용순>을 본 뒤 신준 감독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남성 감독으로서 소녀의 성장통을 이토록 현실감 있는 에피소드로 담아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대학 시절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는 대들고 소리지르던 아이가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못하고, 선생님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인사하고 가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 다음날 괜히 선생님에게 질문을 더 많이 하기도 한다. 이게 사춘기의 모습이 아닌가 싶더라. 또 아이들과 얘기를 해보면 집에서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어른이 별로 없다.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소녀의 세계가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용순은 ‘용 용’보다 ‘순할 순’에 가까운 아이다.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나 얼마간 지니고 있을 법한 퉁명스러움이 그녀가 세상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준 감독은 용순이 “겉으로는 거침없고 당당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는” 인물이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마음을 털어놓거나 욕심을 부려본 적이 없는 인물이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연배우 이수경과의 만남은 신준 감독이 용순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 등 전작을 봤을 때에는 다소 ‘센’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첫 미팅을 하는데 굉장히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더라. 영화와 현실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달라 이 배우라면 양극단의 모습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스무살을 앞두고 감정의 격랑에 휩싸인 사춘기 소녀 용순과 달리 신준 감독은 학창 시절 “한번도 어긋난 적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방황의 시기는 그가 20대 중반 무렵에 갑자기 찾아왔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입시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가고 공대생이 되었지만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더라.” 그렇게 스물다섯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가까이서 지켜본 질풍노도의 소녀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해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도 많다는 신준 감독의 목표는 “어떤 영화를 만들든 사람 사는 이야기와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시작한 뒤 매해 사춘기를 겪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이 신인감독이 ‘용을 쓰고’ 만들어낼 미지의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용순>은 어떤 영화

용순은 지방 소도시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소녀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아버지와 소원해진 그녀는 집에 늦게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로 육상부에 가입하고, 지도를 맡은 체육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다. 선생님도 용순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선생님을 향한 비밀스러운 감정을 키워나가던 어느 날, 용순의 친구 ‘빡규’(김동영)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온다. 체육 선생님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용순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충청도 사투리의 매력

<용순>을 보고 나면 청춘 성장영화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듣는게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대사에 오묘한 리듬감을 실어주는 사투리는 대전 출신인 신준 감독으로부터 비롯된 설정. 한편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들렀던 충북 옥천을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으로 설정했다. 옥천의 한 개울가에서 자갈을 줍던 기억은 극중 용순의 에피소드에 그대로 반영됐다.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공간인데 영화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장소라는 생각에 충청북도를 샅샅이 뒤져 결국 그 개울가를 찾아냈다. 이 공간만이 주는 어떤 정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용순>의 스틸컷만 보아도 신준 감독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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