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연출로 영역을 확장한 배우들의 명단에 남연우라는 이름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가시꽃>(감독 이돈구, 2012)의 주연배우였고, 이 작품으로 제1회 들꽃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남연우가 올해는 <분장>의 감독으로 부산을 찾았다. 배우로 부지런히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듯,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중엔 출연작도 3편이나 된다. 선종훈 감독의 단편 <마음이 닿으면>(2016), 손태겸 감독의 <아기와 나>(2016), 이호재 감독의 <로봇, 소리>(2015)에 남연우는 짧게 출연한다. 남연우에게 연기와 연출은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감독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담아내는 사람이고, 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인물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사람이다. 내게는 연출이 연기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업이다.” 무엇보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연출과 연기를 겸하는 길을 택했다. <분장>에서도 남연우 감독은 주인공 송준을 직접 연기한다.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인 단편 <그 밤의 술맛>(2014)에서도 그는 주인공 설원을 연기했다. “배우로서 한 인물을 맡아 제대로 끌고 가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현실은 냉담했기 때문이다. <가시꽃>으로 받은 주목이 무색하게 그는 직접 프로필을 돌리며 상업영화의 조·단역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부산행>(2016),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대호>(2015) 등 다수의 상업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모은 돈과 “어머니에게 난생처음 손 벌려 받은 돈” 1700만원으로 그는 <분장>을 완성했다.
<분장>은 성소수자의 삶을 이해한다고 믿었던 무명배우 송준(남연우)이 남동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위선적 태도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최초의 아이디어는 “어느 술자리”에서 건져올렸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성소수자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어떤 분이 ‘나는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 다들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이 있나’ 하는 시선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이해한다는 것에는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무대 위에서의 삶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괴리를 느끼는 배우 송준의 아이러니를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송준의 혼란스러운 심리에 밀착한다. 그리고 이 인물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진정성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진정성은 이 시대가 만들어낸 말 같아”라는 극중 연극 연출가의 말은 곧 지금의 시대가 위선의 시대임을, 송준의 행동 역시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한다. 송준은 결국 자신의 믿음에 발등 찍히고 마는데, 그 위선적 믿음에서 파생된 아이러니한 상황들을 영화는 흥미롭게 포착한다. 가령 동생의 비밀을 알게 된 송준이 더이상 캐릭터에 몰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함께 무대에 오르는 동료 배우들은 송준의 연기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그가 캐릭터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다고 느낀다. 송준의 믿음엔 이미 균열이 심하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남연우 감독은 <분장>의 작업이 “인물들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은 “의미와 상징을 잘 조리하는 감독은 못 된다”면서. 그가 연출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물의 논리”와 그 논리를 증명해 보일 “배우들의 연기”다. 좋아하는 영화로 언급한 작품들 역시 <자전거 탄 소년>(2011)을 위시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블랙스완>(2010), <더 레슬러>(2008), <케빈에 대하여>(2011)처럼 인물에 초밀착한 영화들이다. 서사보다 캐릭터에 먼저 매료되는 남연우 감독의 기질은 어쩌면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작용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는 연기를 하기 전 춤과 먼저 사랑에 빠졌다. 중2 때부터 고3 때까지 비보잉을 했고, 스물다섯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여러 사람들이 으쌰으쌰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 그 순간의 희열이 좋아서” 그는 계속해서 연기를 하고 영화를 만든다. 그의 바람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배우,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해나가는 감독이 되는 것이다. <분장>은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남연우가 천착해온 고민들을 풀어놓은 결과물이다. “나의 진심은 무엇인가, 나는 나에게 얼마나 솔직한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인가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나의 진심을 찾아가고 싶다.”
<분장>은 어떤 영화
무명배우 송준(남연우)은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대형 연극 <다크 라이프>의 오디션을 본다. 트랜스젠더 이나(홍정호)를 만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무용과에 다니는 남동생 송혁(안성민)에게 안무를 부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거친다. 그리고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에 캐스팅된다. 일약 주목받는 루키가 된 송준은 진정성 있는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동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매일 트랜스젠더가 되어 무대에 서야 하지만 송준은 연극에 몰입할 수 없다.
캐스팅의 완벽성
“짧게 지나가고 마는 역할이라도 연기가 어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역들의 연기까지 신경 썼다는 남연우 감독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없었다면 <분장>은 이만큼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 이나로 출연한 홍정호, 남동생 송혁 역의 안성민, 극중극 <다크 라이프>의 조연출을 맡은 양조아 등 <분장>의 배우들은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노닌다. 오랜 친구이기도 한 오도이 음악감독은 영화 속 이나의 노래 등 여러 인상적인 창작곡들을 만들어준 것은 물론 서로 다른 세 역할의 단역으로 출연까지 해줬다. 남연우 감독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우 겸 감독의 매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