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무성극 속 사내 같은 웃음과 슬픔 -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임대형 감독
2016-10-24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오창환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임대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웃기면서도 쓸쓸한 블랙코미디다. 그 출발은 “코미디 무성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바람에서 왔다. “종종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초기작들을 찾아보다 잠들곤 한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직관적으로 웃을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이 생각에 살을 붙여나간 끝에 애초 계획한 코믹 무성극은 영화 속 영화로 자리잡았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이 무성극에 출연하는 중년의 사내, 시골 이발사 모금산(기주봉)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빛바랜 책을 넘기듯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흑백영화로 빛을 거둬냈고, 장(章)을 구분해 관객이 모금산의 여정을 집중력 있게 좇을 수 있도록 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흑백영화를 고려했다. 머디 워터스를 비롯해 시카고 블루스를 많이 들으며 글을 쓰기도 했고 촬영지가 시골이다 보니 색이 많은 것보다는 흑백으로 톤을 정리하는 게 좋겠더라. 무엇보다도 무성극을 8mm 캠코더로 찍어 흑백으로 전환했는데 그 장면만 흑백으로 가는 건 너무 손쉬운 선택처럼 보였다.” 장별로 레퍼런스가 돼준 작품들을 보면 감독의 심미안이 보인다. “모금산의 일상이 담긴 1장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 소녀>(1989)를 참조했다. 짐 자무시의 영화, 특히 영화 만들기에 지쳤을 때마다 내게 힘이 돼주는 <천국보다 낯선>(1984)은 영화 전체의 정서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했을 것이다.” 말수 적은 모금산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반복된 일들을 하며 하루를 채운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그는 암 선고를 받은 뒤 진짜 배우가 돼보기로 마음먹는다. 모금산은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아들 모스테반(오정환)에게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연출을 제안한다. 모금산은 일기장에 끼적인 글을 아들에게 시나리오라며 내민다. “모금산 주연의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는 자폭하려는 한 남자의 얘기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모금산이 암 선고까지 받았으니 지금 모금산의 심정이 딱 무성극의 사내와 같지 않겠나.” 살고자 하는 대로 살 수 없었던 중년의 남자 모금산. 그가 보이는 돌출 행동은 영화 곳곳에 돌기처럼 튀어나와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누가 모금산을 연기할지가 관건이었다. “모금산 캐릭터뿐만 아니라 모금산이 출연하는 무성영화 속 주인공까지 연기해야 하는 역할이다. 한국의 중년 남자, 소위 ‘아저씨’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가 아니라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길 바랐다.” ‘멋이 있는 사람’을 찾던 감독의 머릿속에 불현듯 배우 기주봉이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님의 작품에 등장한 기주봉 선생님이 인상적이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체념과 달관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달까. 선생님이 연기를 하면 캐릭터 이전에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해진다.” 신인감독에게는 경험 많은 선배 배우가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전혀. 선생님께서 오히려 어떤 연출 방식을 선호하느냐고 편하게 물어봐주셨다. 대사의 어미의 고저, 장단을 촬영 전에 배우와 맞추는 걸 선호한다고 하자 굉장히 좋아하셨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 선생님과의 작업도 그렇게 하셨다고 하시더라. 허물없이 대해주시는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내가 오히려 많이 배웠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재기 어린 장르적 실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영화 만들기의 방법과 태도에 대한 임대형 감독의 생각이 스며든 작품으로도 읽힌다. 모금산의 일기가 시나리오가 되고, 평범한 이발사 모금산이 배우가 되며, 영화의 제작진도 모금산과 그의 아들과 아들의 여자친구가 전부다. 영화 만들기가 별난 일도 아니라는 해석도 해볼 수 있다. “관객은 저마다의 사연과 각자의 역사 속에서 영화를 본다. 그만큼 영화는 내밀한 매체다. 자신이 유일한 독자이자 글쓴이가 되는 일기야말로 확장되면 은밀한 매체인 영화와 통하지 않을까. 또 아마추어가 만든 듯한 작품의 미덕을 좋아한다. 조금은 서툴러도 그 안에 ‘리얼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임대형 감독 역시 자신 안의 것과 자기 주변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관심사를 벼려 영화로 옮겨왔다. “진지한 코미디를 좋아한다. 코미디야말로 멋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는 건 힘든 일이지만 코미디가 있어서 짧지만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유머를 잃지 말아야겠다.” 바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영화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가고 싶다. “<만일의 세계>(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를 비롯해 지금까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내 주변의 경험들에서 영화의 이야기를 찾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잘 모르는 세계로 뛰어들고 싶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덕에 감독은 얼마간 가시권 밖의 세상으로 넘어가볼 힘을 얻었다. “내가 그린 코미디가 관객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영화제에서 만난 관객의 호의에, 게다가 수상까지. 감사할 따름이다. 첫 장편이 다음 영화들의 청사진이 돼준 것 같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어떤 영화

젊은 시절 배우를 꿈꿨던 중년의 사내 모금산. 그는 조용한 시골 마을의 이발사다. 그는 꽤 오랫동안 일기를 써왔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가족인 아들 모스테반이 있다. 스테반은 영화감독을 준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모금산은 암 선고를 받고 자신의 일기장의 한장을 찢어 아들에게 건네며 영화를 찍어보자고 한다. 주연배우는 모금산 자신이다. 모금산과 아들, 아들의 여자친구는 그렇게 길 위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영화가 완성될 즈음 모금산은 아들에게 애틋한 속내를 고백한다.

기주봉의 담백함

일상에서 모금산이 보이는 강박적인 행동과 무성극 속에서 찰리 채플린을 모사하는 듯한 모금산 연기를 보고 있자면 쓸쓸해진다. 무심히 툭툭 내뱉는 모금산의 화법과 과장 없는 행동에는 사별한 아내를 향한 마음과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위로가 엿보인다. 배우 기주봉의 담백한 연기가 모금산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주효했다. 흑백의 무성영화라는 고전극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꺼내 보인 듯한 감독의 시도가 흥미롭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꽤 낭만적인,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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